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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축 연한 30년의 덫]눈가리고 아웅하는 안전진단

정다슬 기자I 2018.01.10 05:30:03

''안전진단'' 통과율 99%..하나마나
제대로 된 검수역할 못해

[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지난 2011년 서울시는 현행 40년인 재건축 허용 연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서울시는 무분별한 재건축 추진을 막고 집값 안정을 위해 자체 조례를 통해 아파트 준공 시기별로 재건축 연한을 최장 40년까지 적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남구 등 일부 기초자치구가 줄기차게 재건축 연한을 줄여달라고 요구하자 결국 학계와 시민단체 등의 추천을 받아 공동주택 재건축정책자문위원회를 꾸려 노후아파트 11곳을 대상으로 안전진단에 나섰다. 결과는 “아파트 11곳 모두 안전상으로 문제가 없어 재건축이 불필요하다”였다. 당시 이들 단지의 내구연한은 평균 62.5년, 내용연한은 45년 이상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3년 뒤 정부는 재건축 연한을 40년에서 30년으로 단축한다고 밝힌다. 이와 함께 재건축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인 안전진단 역시 ‘구조안전성 평가’와 별도로 층간소음이나 에너지 효율, 노약자 편의성 등 ‘주거환경 중심 평가’도 실시하기로 했다. 안전상에 큰 문제가 없더라도 거주하기 불편하다면 안전진단을 통과할 수 있도록 기준을 대폭 완화한 것이다.

그 결과 안전진단을 신청한 재건축 단지 중 99%가 D등급 이하를 판정받아 재건축을 진행하고 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안전진단 등급은 A~E 등 5단계로 나뉘는데 D등급은 조건부 재건축, E등급은 안전성이 우려돼 재건축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일각에서 “재건축 조합을 만드는 게 안전진단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안전진단은 통과의례로 여겨졌다. 안전진단이 제대로 된 검수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2003년 7월 건설교통부(국토교통부 전신)는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을 개선했으나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그래픽= 이미나 기자
업계에서는 안전진단 용역을 의뢰하는 주체가 재건축 추진위원회인 상황에서 이같은 통과율은 당연하다고 설명한다. 안전진단 전문기관 관계자는 “전체 재건축 비용과 비교하면 적은 금액이지만 그래도 안전진단을 시행하는데 수천만원의 사업비가 지출된다”며 “용역을 의뢰받은 회사 입장에서는 추진위 쪽에 ‘재건축 불가’라는 결과를 내놓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안전진단은 한국시설안전공단과 건설기술연구원, 국토부의 인증을 받은 민간 전문기관이 수행한다. 민간 영역에서 이뤄지는 자체적인 계약인 탓에 용역 결과도 공개하지 않는다. 건축물 안전과 관련된 정보이지만 정부가 이를 축적하거나 관리하는 체계도 없다.

안전진단이 이렇게 쉽다 보니 현장에서도 건물의 내구도나 실질적인 주거환경보다는 수익성에 따라 재건축 여부를 정하고 있다. 1986년 11월 준공된 서울 서초구 반포동 미도아파트는 원래 리모델링을 추진하던 강남 대표 단지였으나 재건축 연한이 40년에서 30년으로 줄자 재건축으로 방향을 틀어 최근 서초구청 안전진단에서 D등급을 받았다. 불과 4년 전만 하더라도 보수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해 리모델링이 추진되던 단지가 재건축 연한이 단축되자 재건축이 필요한 수준이 된 것이다.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아파트와 영등포구 여의도동 목화아파트도 모두 리모델링을 고려하다가 재건축으로 추진하고 있는 단지들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 중인 강남구 개포동 대치2단지 역시 지구단위계획까지 확정하며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지만 일부 주민이 재건축을 주장하면서 내홍을 빚고 있다. 1992년 준공된 대치2단지는 지난해 3월 진행된 안전진단에서는 전체 11개 동이 안전진단 B등급을 받아 최고 3개 층까지 수직증축이 가능할 정도로 내구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4년 후면 재건축 연한을 맞으면서 재건축을 하자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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