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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異야기]①송승환 "인생 1순위는 재미…머릿속은 평창뿐"

장병호 기자I 2017.11.28 05:30:00

송승환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인터뷰
아역 배우·청춘스타 거쳐 제작자 변신
PMC프러덕션 제작 '난타'로 큰 성공
"하고 싶은 일 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

지난 23일 서울 중구 광희동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팀 사무실에서 만난 송승환 총감독이 평창동계올림픽 마스코트인 수호랑 앞에서 올림픽의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부담이 크다. 세계서 75억명이 보는 공연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런데 회의에 들어가면 부담이 사라진다. 어쩔 수 없는 ‘쟁이’라서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 즐거워서다. 지금은 머릿속이 평창으로 가득하다. 하하.”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은 송승환(60) PMC프러덕션 예술감독의 요즘 일과는 평창으로 시작해 평창으로 끝난다. 개막까지 73일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일요일을 제외한 모든 스케줄은 개·폐회식 준비를 위한 회의 또는 연습장 방문으로 채워져 있다.

지난 23일 송 감독을 만나기 위해 찾은 서울 중구 광희동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팀 사무실은 공연 준비를 위한 회의로 시끌벅적했다. 송 감독은 “오늘도 저녁에는 연습을 보러 간다”며 “평생 단 한 번밖에 없을 공연을 위해 지금은 평창만 생각하며 지낸다”고 말했다.

◇아역배우 출신…뉴욕 생활 통해 공연제작자 변신

송 감독은 한국공연계를 대표하는 제작자다. 1989년 환 퍼포먼스의 대표로 공연 제작을 시작했다. 1996년부터는 PMC프러덕션을 통해 50여편의 뮤지컬과 연극을 제작해왔다.

송승환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공연제작자 이전에는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로 유명세를 치렀다. 1965년 여덟 살에 KBS 라디오 어린이 프로그램 ‘은방울과 차돌이’의 MC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1968년 당시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극단 광장의 연극 ‘학마을 사람들’에 출연해 처음 무대에 섰다. 그해 동아연극상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며 연기력도 인정받았다. 20대에는 ‘젊음의 행진’ ‘가요톱텐’ 등 쇼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며 요즘 아이돌 못지않은 청춘스타로 인기를 누렸다.

인기의 정점에 있던 1985년 뉴욕으로 훌쩍 떠났다. 송 감독은 “바쁜 스케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휴식이 필요했고 문화적 갈증도 채우고 싶었다”며 당시 뉴욕행을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국내신문 해외토픽을 통해 뮤지컬 ‘캣츠’의 개막 소식이나 칸영화제 수상작 소식을 접했는데 그런 공연과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과감하게 맨손으로 뉴욕에 가게 됐다.”

이전까지 모은 돈으로 집안의 빚을 갚고 건너간 뉴욕에선 경제적으로는 어렵게 지냈지만 보고 싶은 공연과 영화는 실컷 볼 수 있었다. 3년 6개월 간 뉴욕생활을 통해 송 감독이 얻은 것은 두 가지였다. 배움과 자신감. 수준 높은 공연을 보면서는 배움을 얻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공연을 만나면 대신 자신감을 얻었다. ‘우리도 우리만의 공연으로 해외에서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송 감독은 공연제작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성공한 건 아니었다. 연극 몇 편을 제작했지만 수익을 거의 내지 못했다. 해바라기·변진섭·조덕배·봄여름가을겨울 등 당대 인기가수들의 콘서트를 제작하며 연극에서 입은 손해를 채웠다. 규모가 작은 한국시장에만 소개하는 공연으론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획·제작한 것이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였다.

1997년 호암아트홀에서 초연한 ‘난타’는 송 감독의 대표작이다. 1999년 영국 에든버러프린지페스티벌에서 호평을 받아 해외진출 가능성을 확인했다. 2003년 미국 브로드웨이 공연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세계 57개국 310개 도시에서 공연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국내에서도 해외관광객 대상 전용관을 운영하며 공연관광시장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송 감독은 “‘난타’의 목표는 단 하나 어떻게든 해외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공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대사가 없는 그래서 외국인 관객도 즐길 수 있도록 넌버벌 퍼포먼스가 적중한 것이다. 송 감독은 “지금도 많은 공연이 국내 관광객을 대상으로 만들어지는데 그것보다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목표로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송승환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난타’ 후속작·창작뮤지컬 제작이 목표

올해 송 감독은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냈다. 환갑을 맞았고 ‘난타’ 20주년을 맞았으며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이란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힘든 일도 있었다. 사드 여파로 ‘난타’ 전용관 중 하나인 충정로극장을 폐관한 것이다. 송 감독은 “최근 중국과의 관계가 조금씩 풀리고 있어서 내년부터는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본다”면서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나면 ‘난타’의 해외시장에 더욱 힘을 쏟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한국뮤지컬시장에 대해선 “수익을 낼 수 있는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송 감독은 “지금 뮤지컬시장은 수요는 정체인데 공급은 과잉인 상태”라며 “뮤지컬계 스스로 제작비를 줄이고 출연자의 개런티를 낮추려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해외진출을 통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려는 노력도 함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마친 뒤에는 자신의 본분인 배우와 공연제작에 충실할 생각이다. 송 감독은 “‘난타’의 뒤를 이을 작품이 언제 나올지에 대한 질문이 항상 부담스럽다”면서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난타’에 버금가는 넌버벌 퍼포먼스를 만드는 것, 그리고 해외에 라이선스를 팔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창작뮤지컬을 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로도 활동을 이어간다. 송 감독은 “내년 가을쯤 출연 제안을 받은 작품이 있는데 일단 평창동계올림픽 이후로 모든 걸 미뤄놨다”며 웃었다.

아역배우에서 청춘스타를 거쳐 성공한 공연제작자까지 송 감독은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자신의 자리를 다져왔다.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던 비결로 송 감독이 꼽은 것은 “재미를 1순위에 두고 좋아하는 일을 한 것”이었다. 송 감독은 “돈이나 명예보다 재미가 있어야 무엇이든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가장 행복하지 않은가. 그 생각으로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해나가려 한다”고 각오를 전했다.

송승환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송승환 감독은

1957년 서울생. 휘문고 졸업. 한국외대 아랍어과 명예졸업. 1965년 아역배우로 데뷔. 1968년 연극 ‘학마을 사람들’로 동아연극상 특별상 수상. 1977년부터 1988년까지 극단 76극장 단원으로 활동. 1985년부터 3년 6개월 간 뉴욕서 생활. 1989년부터 1995년까지 환 퍼포먼스 대표로 재직. 1996년 PMC프러덕션 창립. 1997년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 제작. 1999년 ‘난타’로 영국 에든버러프린지페스티벌 초청 공연. 2003년 ‘난타’ 미국 브로드웨이 공연. 2015년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선임. 현재 PMC프러덕션 회장 및 예술감독이자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로 재직 중.

2018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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