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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확대경]우리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김미경 기자I 2021.10.19 06:00:00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우리 애도 여기 병원 다녀서 바로 아기 생겼잖아. 내가 안타까워서 그래.”

며칠 전 걸려온 주인집 어르신의 황당한 통화 내용이다. 수화기 넘어 해맑은 목소리로 다짜고짜 꺼낸 이야기가 ‘우리집 가족계획’이라니. 순간 표정이 굳어 말문이 막혔지만, 머리로는 적당히 불쾌감을 드러내면서도 단호한 대답을 찾기에 바빴다. “어르신, 저희는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는 거예요. 각자 사정이 있을 수 있는 건데, 저희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회사라 이만 끊겠습니다.” 뾰족하게 응수했지만, 한동안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쯤이었나. 오락게임 ‘보글보글’에 꽂혔던 때가 있었다. 50원이면 게임 한판을 할 수 있던 시절, 불량식품 간식을 포기하고 종종 오락실을 찾았다. 그날도 마침 동네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오락실을 갔었는데, 인생에 첫 성추행을 당했다. 누군가 내 허벅지를 더듬었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네 남사친 철수(가명)는 “갑자기 일어나면 어떡해. 너 때문에 나도 죽었잖아”라며 신경질을 냈다. 나는 그이후로 다시는 오락실을 가지 않았다.

전문고졸업을 앞둔 고3때는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는데, 2개월 정도 연수를 받던 중 회사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넘지 못하고 부도가 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를 비롯한 여성 직원들은 퇴직의사도 묻지 않은 채 위로금 몇 푼 쥐어주고 가장 먼저 해고당했는데 일부 남자 동기들은 운좋게 남았다.

오락실에서 겪은 일은 ‘사건’도 안된다는 걸 깨닫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바바리맨을 만나는 일이라거나, 성희롱 정도는 웃고 넘겨야 방송작가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 자연스러운 사회에서 성적 수치심은 여성이 평생 겪어야 할 숙명 같은 일이라는 걸 꽤나 빨리 알아챘다.

벌써 20년이 넘은 일이지만,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큰 국가다. 2019년 기준 성별 임금격차는 32.5%(OCED 평균 12.9%)로 최하위다. 남성이 100만원을 번다면 여성은 약 68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는 얘기다.

지난 6일 여수 해양과학고 3학년 현장실습생 홍모 군은 납 벨트를 허리에 두른 채 잠수 작업을 하다 죽음을 맞았다. 2016년 서울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김모군,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서 작업 중 숨진 김용균씨뿐 아니라 올해 들어 숨진 20대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잇따르고있다. 부당한 차별과 혐오로부터 노출된 약자와 소외계층의 안전망이 되어야 하고, 권리 대신 체념에 익숙해진 노동자들을 지킬 책무는 국회와 정부에 있지만 늘 되돌이표다.

한국 대선은 끝까지 ‘부동산’이다. TV토론회는 낯뜨거울 정도다. 공정·이대남 이슈에 가려진 채 진짜 일상에 놓인 여성, 청년, 노동은 이슈가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여성, 청년, 노동자들의 박탈감은 부동산 값이 잡힌다고 사라질까. 부동산 값이 잡히면 여성의 지위는 높아질까. 노동자들의 투쟁이 줄고, 청년 취업이 해결될까.

문득 드는 생각 하나. ‘우리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기 전 발달장애를 갖고있는 여동생 혜정씨를 18년만에 시설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작사·작곡한 노래제목이다. 요즘 부쩍 읊조릴 때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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