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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서가]②"<사기>가 가르친 건 결국 사람의 소중함이더라"

박수익 기자I 2015.10.28 05:20:30

이건희 회장 언급에 <사기> 본격 정독
`한줌의 흙과 태산`..적재적소 배치-공정평가 배워
사기 완성한 사마천처럼 금융혁신 꿈꿔

[이데일리 대담=이정훈 증권시장부장, 정리=박수익 이명철 기자] 진나라 왕이 이방인들을 내쫓으라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자 초나라 출신 이사(李斯)가 글을 올린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양보하지 않아 그렇게 높아질 수 있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아 그렇게 깊어질 수 있는 법입니다.”

천하를 제패할 큰 뜻이 있다면 출신과 성별을 불문하고 찾아오는 인재를 중용해야 한다는 이 말에 감복한 왕은 자신의 명을 취소하고 이사의 벼슬을 높여주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傳)의 한 대목이다. 훗날 이사는 천하를 제패한 진나라의 승상(현재의 국무총리)까지 올라 자신의 능력을 펼쳤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26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집무실에서 사마천의 사기(史記) 열전(列傳傳)편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 김정욱 기자)
◇나를 알아주는 곳을 찾아 일해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이 대목을 사기에서 제일 기억나는 구절 중 하나로 꼽았다. 대학 졸업과 함께 삼성물산에 입사한 황 회장은 영국 유학과 외국계 금융회사 근무를 거쳐 삼성에 복귀, 회장 비서실과 삼성전자·생명·운용·증권 등 많은 계열사를 넘나들었다. 삼성을 떠난 뒤에도 우리은행·KB금융지주를 거쳐 현 금융투자협회까지 이직이 잦았던, 그래서 늘 한 길을 걸으면서도 이방인이기도 했던 그의 인생궤적이다. 그래서 그는 직‘장’(場)이 아닌 직‘업’(業)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내가 추구하는 진정한 프로금융인으로서 일할 곳을 찾았고 나를 알아주고 써주는 주인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 주인이 국가가 됐든, 민간기업이나 공기업이 됐든 말이죠. 다행히 저는 좋은 조직에 있었지만, 가끔은 장점을 잘 살려서 조직에 도움이 되게끔 포용하고 격려를 해준다면 훨씬 더 좋을 텐데 밥그릇과 영역 때문에 배척하는 사람과 조직이 있어요. 그런 일을 볼 때마다 이사의 진언(盡言)이 생각납니다.”

◇史記는 현재진행형…이건희 회장과의 인연

중국 상고시대부터 한나라 무제까지 2000여년의 역사를 130편(52만6500자)에 담은 사마천의 사기는 곳곳에서 인재 등용과 관련한 다양한 교훈을 후세에 전한다. 황 회장은 계명구도(鷄鳴狗盜: 닭 울음소리와 개 흉내 내는 도둑) 일화로 유명한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도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되짚었다.

제나라 왕의 일족 맹상군은 부친에게 물려받은 가산을 자신의 집에 찾아온 식객들을 후대하는데 쏟았다. 식객이 무려 3000명에 달했지만 귀천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접하며 하찮은 재주도 귀하게 여겼다. 그런 그가 진나라 왕의 초청을 받았다가 계략에 휘말려 목숨이 위태로울 때 자발적으로 동행한 식객들이 갖은 재주로 그를 위기에서 구해줬다.

“사기가 재미있는 건 역사책이라기보다 휴먼스토리이기 때문이죠. 지금도 비슷한 사건이 이 시각 대한민국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황 회장이 사기를 본격적으로 정독한 것은 삼성그룹 비서실 근무 시절이었다. 신경영을 선언한 이건희 회장이 어느날 임원들에게 한비자(韓非子)와 함께 사기를 언급하며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고 주문했다고 한다. 황 회장은 “한비자 세난(說難)편을 감명 깊게 봤고, 사기는 이전에도 읽었지만 당시부터 본격 정독해 특히 열전(列傳)을 재미있게 봤다”며 “지금도 완역본·만화본·요약본 등 다양한 종류를 시간날 때 틈틈이 읽고 가끔 축사나 연설을 해야 할 때 고사성어를 인용하고 싶어 이 책을 꺼내 들곤 한다”고 했다.

◇한 줌의 흙과 태산…공정한 평가 능력

다시 ‘한 줌의 흙과 태산’ 이야기로 돌아간다. “프로금융인, 프로경영자로서 어떻게 행동할지 늘 생각합니다. 항상 드는 생각이 한 줌의 흙과 태산의 관계예요. 제가 어느 조직에 들어가서 이바지하고 싶어도 조직이 먼저 개방적으로 저를 받아줘야 하죠. 또 제가 어느 자리를 맡고 있는데 외부사람이 들어오면 제가 먼저 개방적으로 그 사람을 받아서 환영해줘야 하는 것이죠.”

김용범 메리츠화재 사장, 주진형 한화투자증권 사장, 황인준 네이버 최고재무책임자(CFO) 등도 그렇게 황 회장이 과거 삼성 근무 시절부터 눈여겨보며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이다. 황 회장은 “살아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관계”라고 강조했다. 자신을 쓰는 사람에게는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배치해 공정한 평가를 내려주길 바랬고, 자신이 경영자가 된 후에는 학교나 출신을 따지는 일이 있으면 안되겠다는 것을 스스로 지켜야 할 계명으로 삼았다.

“강하게 주장하는 스타일인 제가 이만큼 크고 따르는 사람도 제법 있었던 것은 사람만큼은 차별하지 않고 능력 중심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자부합니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황영기 회장은 1952년 경북 영덕 출생으로 서울고, 서울대(무역학)를 졸업하고 1975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금융인으로 변신했다. 뱅커스 트러스트은행을 거쳐 삼성그룹에 복귀해 회장 비서실 국제금융팀장과 인사팀장, 삼성전자 자금팀장(상무)을 거쳐 삼성증권 사장까지 지냈다. 이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KB금융지주 회장을 역임했고 올해 증권·자산운용·선물회사 등 161개 회원사들의 투표를 통해 제3대 한국금융투자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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