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은 전기차와 수소차 개발, 태양광 발전소 건설 등을 위해 녹색채권 발행에 나섰고 자본시장에서도 연기금을 필두로 적극 투자에 나서는 분위기다. 그간 녹색채권 시장 걸림돌이었던 평가방법론 부재가 해소되고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 각종 유인책 등이 더해지면서 한동안 ESG 채권시장은 환경 부문을 중심으로 성장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 두 달 만에 상장잔액 99% 급증
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현재 상장된 ESG 채권은 총 621개 종목으로 상장잔액은 92조473억원 규모다. 상장잔액 기준으로 사회적채권이 78조5893억원(85.38%)으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지속가능채권이 7조4100억원(8.05%), 녹색채권이 6조480억원(6.57%)을 기록했다. 이는 주택금융공사 주택저당증권(MBS)이 사회적 채권으로 분류되는 영향이 크다.
ESG채권은 채권 발행으로 조달된 자금이 친환경(E), 사회적 가치(S), 지배 구조 개선 및 지속 가능한 성장(G)에 관련된 투자에 사용돼야 한다. 여기에서 신재생 에너지 등 친환경 프로젝트나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되는 채권이 녹색채권이다. 이외 사회가치 창출 사업에 투자하는 자금을 조달하는 사회적채권이 있고, 환경 친화적이며 사회가치를 창출하는 사업에 투자할 자금을 마련하는 지속가능 채권으로 분류한다.
이 가운데 올 들어 녹색채권 발행이 급증하고 있다. 녹색채권은 지난해 말 기준 31개 종목으로 상장잔액이 3조300억원에 그쳤다. 하지만 불과 두 달여만에 발행 종목이 27개, 상장잔액이 3조180억원이나 늘어 99.6% 증가했다. 특히 작년 상반기 녹색채권 발행은 1건도 없었고, 9~10월 10개 종목이 상장, 상장잔액이 9600억원에 불과했다.
다른 채권과 비교해도 녹색채권의 성장세는 두드러진다. 작년 말 기준 사회적채권 상장잔액은 73조5913억원으로 2개월간 4조9880억원 늘어 증가율이 6.79%에 불과하다. 지속가능채권은 이 기간 5조4400억원에서 7조4100억원으로 36.21% 늘었지만, 녹색채권 증가율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핵심 공략으로 기후변화, 사회정의, 기업책임 등을 제시하며 ESG 이념에 부합하는 정책을 제시했고, 정부도 탄소의존형 경제를 친환경 저탄소 등 그린경제로 전환하는 ‘그린뉴딜’(2025년까지 총사업비 30조원 투자)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연초 SK(034730), 한화(000880) 등 대기업 수장들이 신년사에 ‘ESG 경영을 전면에 내세웠다. 실제로 올해 롯데지주를 시작으로 현대제철, 현대오일뱅크, 현대자동차, SK 등 대기업 그룹의 녹색채권 발행이 집중되고 있는 모습이다. SK하이닉스 등 SK그룹은 국내 기업 최초로 RE100(재생에너지 100%)에 동참했다. RE100은 애플, TSMC 등 글로벌 IT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말 SK하이닉스의 5억달러 규모 녹색채권 수요예측에 국내외 기관투자자 자금 54억달러(6조원)가 몰리면서 발행규모를 2배(10억달러)로 늘리기도 했다.
롯데지주(004990)의 경우 올해 초 수요예측에서 모집금액 300억원의 3배인 900억원의 자금이 쏠려 3대 1의 경쟁률을 기록, 600억원으로 증액해 발행했다. 롯데지주는 롯데인재개발원 오산캠퍼스 친환경 건물 준공에 쓰일 자금 모집을 위해 채권을 발행했다.
특히 현대차(005380)의 경우 전기차 및 수소전기차 제품 개발 투자를 위해 창사 후 처음으로 녹색채권 발행을 결정했고, 3000억원 모집에 2조원이 넘는 뭉칫돈이 몰렸다. 모집액을 훌쩍 뛰어넘는 수요가 모이자 결국 4000억원으로 발행액을 늘렸다.
이외 현대제철도 탄소배출 저감 대기오염 물질 저감 설비투자를 위해 발행한 녹색채권 수요예측에서 예정액을 8배 웃돈 2조원 넘는 자금이 몰려 발행규모를 2500억원에서 5000원으로 늘린 바 있다.
◇ 밑그림 그려진 ESG 투자
이처럼 녹색채권의 폭발적 성장에는 시장에서 요구하는 네 박자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작년까지만 해도 발행자와 투자자만 있고 ESG채권 관련 제도적 부분이나, ESG채권 평가와 관련해 적정 평가사에 대한 방법론도 미흡했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정부의 정책적 가이드라인과 신용평가사들의 ESG채권 인증 및 평가 관련 사항이 속속 발표됐다.
박태우 한화자산운용 크레딧파트 과장은 “작년까지만 해도 녹색채권이라는 라벨링만 있었을 뿐 체계가 잡히지는 않았다”며 “주로 회계법인이 검증 형태로 외부기관 평가가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그동안에는 회계법인이 국제자본시장협회(ICMA) 등의 가이드라인을 고려해 회계법인 자체적인 판단기준과 절차에 따라 검증했다. 특히나 투자자 입장에서 평가방법을 점검할 길이 없다는 점은 검증의 한계로 작용했다. 인증 역시 등급이 아닌 적격, 부적격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지난해말을 기준으로 한국신용평가와 NICE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등 신평 3사가 각사의 ESG 인증 평가방법론을 발표하고 ESG 인증사업에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ESG인증에 뛰어든 것은 한신평이다. 한기평은 최근에 ESG센터를 별도로 마련하고,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박태우 과장은 “신평사들이 ESG 인증사업을 펼치면서 일반기업에서도 녹색채권 발행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작년 말에 환경부를 비롯한 정부의 제도적인 가이드라인이 나온 영향도 크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정책당국이 최초로 ‘녹색채권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환경부는 ‘한국형 녹색채권 안내서’를 발표하고 △녹색채권 발행개요 △조달자금 사용처 △프로젝트 평가·선정 절차 △조달자금 관리 △사후보고 등의 녹색채권 관리체계를 발표했다.
이재민 환경부 사무관은 “가이드라인 발표 후 급격하게 녹색채권 발행이 늘어났다”며 “가이드라인 마련을 통해 그린워싱을 방지하고 시장 활성화를 도모했다”고 자평했다. 이어 “가이드라인 발표 후 구체화 작업을 진행 중”이라며 “올해 안으로 녹색분류 체계 등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김영진 금융위원회 사무관은 “(ESG 채권 관련) 제도화(법제화)는 추후에 검토할 것”이라며 “사후보고와 같이 자율적인 공시를 추진하고 경과를 보면서 단계적으로 구체화할 것”이라고 전했다.
◇ 수수료에 법인세까지…유인책 마련
ESG 채권 발행 확대를 위해 각종 유인책도 마련하고 있다. 이미 한국거래소에서는 발행기관이 자금조달 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신규 상장 수수료 및 연부과금을 면제해주고 있다. 또 외부평가기관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금융지원도 이뤄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힘을 보태는 양상이다. 작년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녹색금융 촉진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발의된 법안을 보면 녹색분류체계상의 사업에 대한 금융제공을 목적으로 발행되는 녹색채권에 대해 이자소득과 법인세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오는 2025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혜택을 준다.
민 의원은 “녹색채권이 아직은 ESG채권 내에서 비중이 작으나 앞으로는 그 비중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법안 조문에 대한 실무 협의 중이다. 법제화를 통해 그린워싱 채권이 출회하는 것을 막고 녹색 투자 환경 조성에 힘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