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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에서 명절 가족 모임에서 오가는 언행 중 성차별적인 것은 무엇인지 묻는 시민 제보를 받았다. 불과 1주일 만에 약 1200명이 의견을 올렸다.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일들이 차고도 넘쳤다는 방증이겠다. 제보자의 77%가 성차별 언행을 경험했다고 답했고, 그중 일방적인 가사 부담을 첫 번째 요인으로 꼽았다. ‘여자들만 음식을 장만하게 하고, 남자들에게는 나갔다 와라 한다’거나, ‘남자들은 고스톱이나 바둑, 아니면 방에서 아예 나오지 않으면서 중간에 밥도 차려 달라한다’ ‘일하면서 중간에 남자들 술상도 차린다’는 답변들이 달렸다.
고작 1년에 두어 번 하는 일 그것도 못 참느냐고 생각할 법한데 사실 당사자는 일의 강도가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한 부담이 문제였고, 불평등한 부담을 가능하게 하는 서열이 억울했던 것이다. 명절은 1년에 두어 번씩 반복해서 그 서열을 확인 당하는 날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집에서는 합리적이던 남편, 집안 일 분담도 제법 해내던 남편도 시가의 문지방을 넘는 순간, 갑자기 남편에서 주인집 어른으로 진급한 것처럼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잡는 기본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뭐, 자기 영역이라서 그렇겠지 애써 좋게 생각하다가도, 서방님, 아가씨, 도련님 하는 호칭까지 떠오르면 아내가 하인이냐, 며느리가 하인이냐는 분노가 생기는 것이다. 사실 시가족을 부르는 호칭은 양반과 하인 같은 전형적인 갑을관계에서 쓰던 언어들이 아닌가.
가족의 형태가 다양화하고 가족 규범도 달라지고 있다. 어른 남자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던 가부장제 가족 모델이 더 이상 일반적이고 유일한 모델이 아닌 것이 현실이다. 그에 맞게 가족 관계가 평등하고 상호배려 하는 관계로 재정립되지 않으면 명절 가족 모임은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 되기 어렵다.
작은 집 며느리의 위치를 한마디로 정리해주고자 했던 그 어른은 십 수 년이 지난 지금 어찌 되었을까. 그때의 ‘졸병’은 아직도 그분을 군대 상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 되려면, 슬프게도, 그분의 부재가 필요했다. 혹시 이글을 읽는 분 중에 어쩐지 친지들이 자신을 슬슬 피하는 것 같거나 얼른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면, 원래 명절 가족모임이란 그런 것이라고 자위하기 전에 자신의 언행을 한번 되짚어 볼 일이다.
물론 나는 그분이 이제라도 자신의 며느리를 평등한 가족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기를, 그리하여 명절이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