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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짬짜미 수요예측에…금융당국도 메스 들이댄다

김인경 기자I 2022.02.25 05:15:00

LG엔솔 1경5000조원 수요예측 '허수'논란
수요예측, '적정가격산출' 기능 사라져
한 주라도 더받기로 변질…공모주 개미에 왜곡 시그널
당국 "제도 개선 필요성 인식"…대선주자들도 '헛점' 지적

[이데일리 김인경 기자] 갖가지 기록을 쏟아낸 LG에너지솔루션(373220)의 기업공개(IPO) 후폭풍이 수요예측 시장에도 번지고 있다. 기관 수요예측에서 1경500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몰리자 시장은 환호했다. 하지만 ‘허수 주문’에 따른 착시 효과라는 점이 드러나며 수요예측 제도에 손을 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관들의 ‘뻥튀기 주문’으로 수요예측의 가격 결정 기능이 훼손되면서 정당한 주문을 넣는 기관투자자는 물론 일반 투자자에게 왜곡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지적들이 시장뿐 아니라 정치권에서까지 나오고 있다. 국내 자본시장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공모주 투자에 적극적인 개미들의 관심을 이어가려면 수요예측의 신뢰성을 높이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대출한도? 생각 안한다…많이 적어 내는 게 관행”

2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LG에너지솔루션(373220) 상장 과정에서 수요예측에 참여한 국내 680개 기관 중 80% 이상이 최대치인 9조5625억원치를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1주라도 더 많이 배정받기 위해 너도나도 주문금액을 높게 써낸 탓이다. 680개 기관의 자본금 총액이 11조5000억원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비현실적인 주문 규모다. 결국 ‘1경5000조원’이라는 매수 주문 역시 현실성 없는 뻥튀기 주문이었다는 의미다.

수요예측은 IPO에 나선 회사의 주식을 얼마에, 어느 정도 매수하고 싶은지 기관 의중을 확인하는 절차다. 이 과정에서 최종 공모가가 확정된다. 지난해부터 공모주 투자에 집중적으로 나서고 있는 개인투자자도 수요예측 경쟁률을 보며 흥행을 가늠하고 투자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LG엔솔 청약 과정에서 드러났듯 수요예측 결과를 무조건 믿는 것은 위험하다. 개인투자자는 공모주 청약을 하면서 청약금의 50%를 증거금으로 예치해야 하지만 기관은 증거금 없이 일단 주문을 넣은 후, 추후 배정 물량에 해당하는 돈만 낸다. 자본금이 부족해 당장 투자할 돈이 없더라도 우선 공모주 물량을 배정받기 위해 ‘허수 주문’을 넣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한 투자자문사 관계자는 “받을 수 있는 물량은 얼마 되지 않는 만큼 운용자산이나 끌어모을 수 있는 자본은 생각하지 않고 많이 적어내는 건 관행”이라며 “물론 쓴대로 받을 것 같은, 투자가치가 낮은 종목은 무리하게 주문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허수 주문을 걸러낼 장치는 없다. 주문을 받는 주관 증권사 역시 허수주문에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다. 허수 주문이라도 기관의 주문이 많으면 수요예측은 흥행하고, 수요예측 결과가 좋으면 공모가를 희망 범위 상단 혹은 그 이상으로 확정할 수 있다. 게다가 수요예측 경쟁률을 보고 투자하는 개미투자자들의 이목을 끌며 수수료도 얻을 수 있다. 결국 피해는 합리적인 투자를 할 수 없는 개인투자자만 입는 셈이다.

국내 최대규모 기업공개인 LG에너지솔루션 일반 투자자 대상 공모주 청약일인 18일 서울 영등포 여의도동 신한금융투자에서 고객들이 상담을 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기울어진 운동장’논란 속…대선주자들도 ‘고쳐야’

개인투자자들은 기관투자자들의 허수 주문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든다고 지적한다. IPO에서도 기관투자자들에게 불공평한 혜택이 주어지면서 개미들만 왜곡된 정보를 취득하게 된다는 얘기다. 실제 일반투자자의 경우 기관 수요예측 경쟁률이 높을수록 ‘투자가치가 좋은 기업’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수요예측이 적정 가격을 산출하는 과정이어야 하는데, 기관들이 한 주라도 더 받기 위한 장으로 변질됐다”고 말했다.

결국 금융당국도 칼을 뽑았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이데일리에 “수요예측 문제와 관련해 전반적인 규정 개선을 금감원과 함께 검토하고 있다”면서 “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가 있는 만큼 최대한 빠른 시일에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9일 “IPO를 할 때 수요 예측과 관련해 기관투자자들의 역할이 있을 수 있다”면서 “금융위와 긴밀히 협의하고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금융투자협회는 투자일임업을 등록한 후 2년이 지나거나 투자일임 규모가 50억원 이상일 때만 회사의 고유 재산으로 수요 예측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증권 인수업무 등에 관한 규정’을 이달 25일(수요예측 참여요건 강화규정은 4월 증권신고서부터)부터 적용할 계획이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논의 과정에서 더 강한 제재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특히 3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도 수요예측 시장에 칼날을 겨누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페이스북에서 “수요 조작도 주가 조작의 일종”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후 △기관투자자(외국인 포함) 의무보호확약 강화 △수요예측 허수 청약에 대한 시장질서 교란 방지 △특정집단에 의한 사모펀드 반칙 운용 방지 등의 공약을 내놓았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경제 책사인 윤창현 국민의힘 선대위 정책본부 경제본부장은 “한국 자본시장이 고도로 발달했지만 아직 이렇게 허점과 구멍이 많다”면서 “업계에서 스스로 개선책을 찾으려 노력해야지 폐단이 이어지면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다만 과도한 규제는 자칫 IPO 시장 자체를 죽일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실제 기관투자자들의 뻥튀기 가격 제시를 막기 위해 국내에서만 있던 증거금 제도 부활을 되살리면 해외 기관투자자들의 자금 유입이 축소될 수 있다. 일반투자자와 기관투자자의 기업 분석능력과 리스크 관리 역량도 차이가 있는 만큼 동일 규제를 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IPO 관계자는 “허수 주문이 문제일 뿐인데 현행 제도 모두를 문제 삼는 것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허수 주문을 자주 내는 기관을 상대로 제재금을 올리거나 처벌 강도를 높이는 정도로 접근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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