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藝인] 날개 단 여든 노장 이건용의 이유있는 '비상'

오현주 기자I 2021.10.26 03:30:00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 이건용
키아프 2021서 '바디스케이프' 2억대 팔려
갤러리현대 개인전에 건 신작 34점도 완판
서울옥션·케이옥션 최근 출품작 모두 '낙찰'
1976년부터 신체활용 바디스케이프 한우물
작품세계 뒤늦게 인정…국내외 미술계 주목

작가 이건용이 자신의 드로잉 소품이 걸린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 두가헌에서 ‘바디스케이프 76-1’을 시연한 종이상자를 앞에 두고 ‘아주 특별한 포즈’를 취했다. 여든 노장의 소소한 행위예술은 안경을 거꾸로 쓰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의논하며 살아야 해. 대화를 하는 거지. 경계와 나이를 벗어나야 하고. 당리당략을 벗겨내야 하고. 사람들이 왜 다투는 줄 알아? 대화 안 하고, 경계와 나이 내세우고, 당리당략에 빠져서 피 터지게 싸우는 거야.”

어쩌다 나온 말이고, 그냥 해본 소린 줄 알았다. 그런데 뼈가 있는 말이었구나. 남 들으란 것보다 나 들으라는 쓴소리였구나. 2년 전 한 개인전에서 불현듯 꺼냈던 그 ‘역설’을 새삼 들춘 건, 요즘 그이의 행보에서 그 말이 자꾸 들려서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도 사람들과 친근히 소통하고, 경계는 두지 않고 나이는 잊고, 당리당략과는 애초에 거리가 먼. 그래서 결론은? 팔 뻗치는 만큼 파닥거리며 그렸다는 그 날개를 달고 그이는 비상 중이다, ‘날고 있다’.

작가 이건용(79). 최근 미술시장 어디를 기웃거려도 보이는 이름이다. 단편적인 성과를 한번 보자. 지난 한국국제아트페어 ‘키아프 2021’에서 갤러리현대 부스에 걸었던 200호 회화작품 ‘바디스케이프 76-2-2021’(2021)이 2억원대에 팔렸다. 연작 ‘그리기의 방법’을 비롯해 크고 작은 드로잉 등도 ‘완판’됐다. 이달 말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여는 개인전 ‘바디스케이프’에서 불어온 돌풍을 이어갔으려나. 두 달 남짓한 개인전에서 전시작 34점이 싹 팔렸다는 얘기가 들렸다.

지난 한국국제아트페어 ‘키아프 2021’에서 갤러리현대 부스에 걸었던 이건용의 200호 대작 ‘바디스케이프 76-2-2021’(2021). 2억원대에 팔렸다. 화면을 등지고 머리끝부터 다리 좌우 끝까지 양팔이 갈 수 있는 만큼 그어내 제작한 작품이다(사진=갤러리현대).


화랑만도 아니다. 지난달 ‘서울옥션 가을세일’에선 10호 크기의 ‘무제’(2011)가 9900만원에 팔렸다. 추정가 2500만~5000만원이던 작품이다. 역시 10호 크기로 6100만원에 팔린 ‘그리기의 방법’(2016) 등, 출품한 4점도 줄줄이 낙찰행렬에 끼었다. 하루 뒤인 ‘케이옥션 9월 경매’에선 20호 크기 ‘그리기의 방법’(2011)이 8500만원을 부른 응찰자에게 안기는 등 출품작 3점이 완판, 또 ‘케이옥션 8월 경매’에선 50호 ‘바디스케이프 76-1-2017’(2017)이 9500만원에 낙찰되는 등 출품작 4점 모두를 새 주인에게 기꺼이 넘겼다.

‘팔렸다’도 중요하지만 사실 유심히 볼 대목은 출품작 수다. 올 초까지만 해도 한두 점씩이던 거래작품 수가 크게 늘었다. 미술시장을 슬슬 움직인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이건용이라 쓰고 흥행작가라 읽어도 될 터. 여든 노장에게 ‘이제야’ 붙일 수 있는 묵직한 타이틀이다.

◇“그리는 것은 신체를 움직이는 것”…바디스케이프의 탄생

평범한 ‘그림쟁이’는 아니었다. 1963년에 쓴 그이의 일기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린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니. 그린다는 게 무엇인지.” 세상에 60년 전 고민을 지금껏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런데 여기 있다. 사실 답을 찾지 못해서도 아니다. 여전히 그이는 답안을 점검하고 있는 중이다.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76-1-2021’(2021·171×151㎝). 갤러리현대 개인전에 걸린 작품은 화면 뒤에서 팔이 뻗치는 데까지 물감을 칠해 완성했다. ‘내 몸을 이용해 그린 그림’으로 1976년 시작한 ‘바디스케이프’ 연작은 회화에 대한 작가의 긴 고민을 잠시 끊어간 ‘답’이자 작가 화업에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내 몸을 이용해 그린 그림’이 긴 고민을 잠시 끊어간 ‘답’이자 작가 화업에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신체의 풍경’이란 뜻의 ‘바디스케이프’ 연작을 내놓은 거다. 작가는 ‘그리기’의 전제조건을 자신의 키와 양팔, 다리 길이로 잡았다. “그리는 것은 신체를 움직이는 것”이라 믿어온 철학의 ‘실기 편’인 셈이다. 굳이 화면을 응시하거나 묘사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가 허용하는 만큼만 팔을 뻗어서 선을 그리는 동작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시작은 1976년이다. ‘바디스케이프’란 작품명이 붙는 모든 작품에 들어가는 숫자 ‘76’은 그 출발점을 의미한다. 그 위에 ‘그리기의 방법’을 하나씩 붙여갔다. 모두 9가지다. 화면 뒤에서 팔이 뻗치는 데까지 물감을 칠하는 ‘76-1’, 화면을 등지고 머리끝부터 다리 좌우 끝까지 양팔이 갈 수 있는 만큼 그어내는 ‘76-2’, 화면을 옆으로 두고 왼손 오른손 차례로 반원씩 그려내는 ‘76-3’(이른바 ‘하트그림’) 등등. 그중 화면을 마주보고 서서 붓을 쥔 두 팔을 위아래로 격렬하게 파닥거리며 그린 ‘76-9’는 그이에게 거대한 천사의 날개 형상을 선물했다.

‘바디스케이프’란 작품명이 붙는 모든 작품에 들어가는 숫자 ‘76’은 신체의 풍경을 시작한 그 출발점을 의미한다. 그 위에 ‘그리기의 방법’을 하나씩 붙여 9가지를 만들었다. 왼쪽은 화면을 코앞에 둔 채 양팔을 활짝 벌려 닿는 만큼 그려내는 ‘76-6’, 오른쪽은 화면을 마주보고 서서 붓을 쥔 두 팔을 위아래로 격렬하게 파닥거리며 그린 ‘76-9’(‘날개그림’). 갤러리현대가 이건용 개인전에 소개한 작업영상을 다시 촬영했다(사진=갤러리현대·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바디스케이프’를 그리는 방법 중 첫 번째. 화면 뒤에서 팔이 뻗치는 데까지 물감을 칠하는 ‘76-1’이다. 갤러리현대가 이건용 개인전에 소개한 작업영상을 다시 촬영했다(사진=갤러리현대·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번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선 그 9가지 방법을 한꺼번에 공개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이는 “내가 신체를 쓰는 건 대중과 단절된 미술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내 신체를 움직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 그건 어린아이도 한다.”

◇아폴로 뒤통수 그려 홍익대 합격했던 그때부터…

“야간에 서라벌예대를 다녔지. 간호사였던 어머니에게 의지해야 하는 형편 탓에. 어머니는 꼭 홍익대 미대를 보내고 싶어하셨고. 그래서 시험만 보자고 했어. 그때 김환기 선생이 학장이었지. 데생 실기에 아폴로 뒤통수를 그렸어. 그랬더니 물으시데. ‘왜 뒤통수를 그렸느냐’고. ‘특별한 걸 그리려 그랬다’고 대답했어. 그러곤 합격했지.”

아폴로 뒤통수를 얼마나 잘 그렸길래. 그 기량을 미국 미술전문 온라인플랫폼 ‘아트시’가 봤다. 지난해 ‘주목해야 할 예술가 35인’에 그이를 들였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작가를 보는 시선은 그리 너그럽지 않았다. 젊은 시절부터 강렬하게 인상을 남긴 ‘행위미술’이 발목을 잡았다. 그림은 안 그리고 퍼포먼스만 하는 작가로만 ‘찍은’ 탓이다. 사실 지금껏 엿보이는 그이의 ‘쇼맨십’은 그때부터 갈고 닦은 것이긴 하지만. 그러니 아폴로 뒤통수 데생으로 홍익대를 가던 실력으로 그린 그림이어도 팔릴 리가 있나. “회화는 사유의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양식도 테크닉도 기술도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내 회화가 그런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여도 쳐다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76-3-2021’ 연작 12점. 갤러리현대 개인전에 걸린 이른바 ‘하트그림’으로 알려진 작품들이다. 화면을 옆으로 두고 왼손 오른손 차례로 반원씩 그려내는 ‘76-3’의 방법으로 제작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렇다면 요즘 ‘갑작스러운’ 부상은 어떻게 봐야 하나. 세간의 “갑자기”에 제동을 건 이는 김재석 갤러리현대 디렉터다. 오히려 “시장이 가장 늦게 반응한 것”이란다. 이미 조건은 충분했다는 얘기다. “조짐은 2016년부터다. 그해 갤러리현대의 두 번째 개인전을 신호로 리안갤러리·페이스갤러리 등에서 꾸준하게 이어간 개인전, 작년 아트시가 주목한 작가에 꼽히고, 내년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시를 예정하는 등, 여러 요소가 컬렉터를 주목하게 한 거다.” 그뿐인가. 그 특유의 친근한 소통도 사람을 움직였단다. 흔히 ‘한국 원로작가’가 가지는 스테레오타입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그들이 봤다는 거다. 여기에 “단색화 이후 딱히 대안이 안 보이던 미술계에 던진 화두”도 작용을 했을 거란다.

‘변덕스러운 시장’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다져온 여든 노장이 화력을 어찌 이 정도로 정리하겠는가. 분명한 건 혹여 시장이 또 변덕을 부려도 노장의 붓은 미동도 하지 않을 거란 거다. “미술사적으로 이미 정립된 작가”라는 김 디렉터의 말처럼 시장논리에 움직일 붓길은 아니란 얘기다. 노장은 “신체 행위가 끝나면 작업도 끝난다”고 했더랬다. 그 말에도 뼈를 심은 듯하다.

작가 이건용이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 개인전에 건 ‘바디스케이프 76-2-2021’(2021) 앞에서 작품을 제작한 모습을 재현했다. 화면을 등지고 머리끝부터 다리 좌우 끝까지 양팔이 갈 수 있는 만큼 그어내는 ‘76-2’의 방법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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