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강대국 미국에서 한국의 얼굴은 단연 기업들이다. 삼성전자(005930) 스마트폰의 위상은 애플과 맞먹는다. 길거리 어디서든 현대차(005380)와 기아(000270)의 자동차를 볼 수 있다. 바이든 정부가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추진하며 맨 처음 구애한 것이 한국 반도체와 배터리다. 한국 주요 산업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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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만으로 선진국을 외치기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무엇보다 미국 학계와 월가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 않다. 기자는 앨런 블라인더 전 연방준비제도(Fed) 부의장과 인터뷰 전 조율을 통해 한국 얘기를 했다. 그에게 한국은행을 향한 조언을 부탁했더니, “잘 모른다”며 양해를 구했다. 헤지펀드 거물인 댄 나일스 사토리펀드 창립자는 기자에게 종종 시장 흐름을 조언하는데, 원화 자산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대다수의 반응이 이런 식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 투자연구소는 주간 보고서를 낼 때 주식 투자 조언을 선진시장과 신흥시장으로 각각 나눈다. 선진시장은 미국, 유로존, 영국, 일본이다. 신흥시장은 중국과 일본 외 아시아다. 채권 역시 비슷하다. 원화 표시 자산에 대한 리서치는 없다시피 하다. 여러 한국 기업에 지분 투자를 한 블랙록이 이 정도이니, 다른 기관들은 더 심각할 것이다.
무엇부터 풀어야 하나. ‘한국 돈’ 원화를 주류 금융판에서 자주 유통시키는 게 첫 열쇠라고 본다. 한국산 부품과 완성품이 세계를 누비며 산업의 위상을 끌어올린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러나 현재 원화 현물은 한국(역내)에서만, 한국 시중은행들만, 정해진 시간 안에서만 사고 팔 수 있다. 24시간 어디서든 누구든지 거래 가능한 달러화, 유로화, 엔화 등과는 지위가 하늘과 땅 차이다.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다. 포렉스닷컴에 따르면 세계 10대 통화는 미국, 유로존, 일본, 영국, 중국, 호주, 캐나다, 스위스, 홍콩, 뉴질랜드 순이다.
나름의 사연은 있다. 정부가 1998년 외환위기 트라우마 탓에 규제와 관리를 우선해서다. 그 덕에 정부는 서울외환시장에서 원화 흐름을 훤히 들여다보며 환율 변동성을 줄일 수 있었지만, 반대로 거래량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원화 환전성이 떨어지는 부작용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가 월가 변방에 머무르는 냉정한 현실이다. 삼성이 수십년 해외를 누빌 때 유수 금융그룹은 국내 과점 구조에 안주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이제는 원화 국제화를 향해 직진해야 할 때다. 정부와 시중은행은 한국 경제의 체력을 믿고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원화 현물의 해외(역외) 거래를 앞당겨야 한다. 그래야 십년 넘게 허탕만 친 MSCI(모건스탠리 캐피털 인터내셔널) 선진국 지수 편입 역시 가능하다. ‘공무원 마인드’로 해외 투기자본에 대한 우려만 외치면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