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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에 날아든 비수..이재명 출생[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I 2022.12.22 00:03:00

독립운동가 이재명, 1909년 12월22일 이완용에게 비수 날려
미수 그쳤지만 항일 투쟁의지 불지펴..훗날 건국훈장 추서
정치인 이재명 호적상 출생일이 의거일과 공교롭게 겹쳐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17일 일본국과 을사조약(제2차 한일 협약)을 체결했다. 전년에 체결한 1차 한일 협약에 이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무력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앞으로 대한제국은 외교를 하려면 일본국을 거쳐야 하고, 이 업무를 총괄할 일본국 조직 통감부(총독부 전신)를 둬야 하는 게 골자였다.

독립운동가 이재명.(사진=국가보훈처)
을사조약에 앞장선 대한제국 인사 5명(을사오적) 가운데 하나가 이완용 학부대신이었다. 공을 인정받은 이완용은 내각총리대신으로 영전(1907년)하고 매국의 선봉에 선다. 고종 황제는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으나 무위에 그치고 폐위당했다. 고종에 양위를 건의하고 내각 회의에서 퇴위를 결정한 게 이완용이었다. 정미칠조약(1907년·군대 해산), 기유각서(1909년·사법권 박탈)도 이완용의 손을 거쳤다.

독립운동가 이재명은 1909년 12월22일 이완용에게 비수를 날렸다. 이완용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는 틈을 노린 거사였다. 현장에서 먼저 이재명의 비수에 맞은 이는 이완용을 태운 인력거꾼 박원문(사망)이었다. 이재명은 다시 이완용에게 세 차례 비수를 날렸지만 모두 급소를 비켜갔다. 이 사실을 모른 이재명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국 경찰에 잡혔다.

이재명은 일본국 판사가 주재하는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법정에서 거사에 동조한 이가 누구냐는 심문에 “이완용을 죽이는 데 찬성한 이는 2000만 동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완용의 죄목을 여덟 가지로 제시했다. 을사조약과 정미칠조약, 기유각서가 맺어지는 데 이완용이 관여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심리를 마친 일본국 판사는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자 이재명은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1910년 8월22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이재명의 사형 판결은 확정됐다. 그해 9월30일 이재명의 교수형이 집행됐다. 향년 22세.

이재명의 의거는 독립투사의 항일 의지에 불을 지핀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1962년 이재명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그를 기리는 위패가 세워졌다.

대대적인 수술을 받은 이완용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한국 흉부외과 1호 수술로 기록되는 현대적인 수술이었다. 이완용은 그날 입은 폐의 상처 탓에 줄곧 폐렴과 천식을 앓으며 1926년 고통 속에 갔다. 사인은 폐렴이었다.

동명의 정치인 이재명(더불어민주당 대표)은 호적상 1964년 12월22일 출생했다. 공교롭게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의거일과 겹친다. 실제로는 1963년 10월 어느 날 태어났는데, 출생신고를 늦게 한 탓이다. 정치인 이재명은 지난해 SNS에 “어머니가 고된 노동에 아홉이나 되는 아이들을 낳아 일곱이나 키웠기 때문에 내 생일을 잊어버린 적이 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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