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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외출하면 유치장 갔다고요?…마지막 통금의 밤[그해 오늘]

한광범 기자I 2023.01.04 00:03:00

1982년 통금 폐지…정부수립 37년 만에 역사속으로
통행증 없으면 위반시 유치장 구금…즉결심판 회부
1962년부터 점진적 해제…3S 정책 연장선으로 폐지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1982년 1월 4일 밤. 정부수립 이후 37년간 이어지던 우리나라의 야간통행금지, 즉 ‘통금’의 마지막 단속이 벌어진 날이다.

통금 폐지를 하루 앞둔 날이었지만 시민들은 여전히 통금 시간을 어길까 자정 직전 귀가를 서둘렀다. 통금 단속을 위해 길거리를 순찰 중인 경찰도 자정부터 통금해제 시간인 5일 새벽 4시까지 정상적으로 통금 단속을 했다.

다만 통금 폐지가 사실상 결정된 상황에서 경찰의 단속은 이전에 비해 느슨했다.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통금위반으로 벌금을 통고받은 시민들은 86명으로 평소의 절반에 그쳤다.

그리고 5일 오후 3시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내부부 장관이 ‘야간통행금지해제 안건’을 보고하며 통금은 37년 만에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야간통행금지 폐지 전날인 1982년 1월 4일 밤 통금 단속 모습. (사진=연합뉴스)
통금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조선과 같은 전근대사회에선 치안상 목적으로 보편적으로 시행된 제도였다. 밤이 되면 빛을 찾기 어려웠던 시기였던 만큼 자연스럽게 생긴 제도였다.

조선시대 통금은 고종 즉위 32년이던 1895년 9월 폐지됐으나 일제 강점기 다시 부활했다. 그리고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이던 1945년 9월 서울과 인천을 시작으로 한반도 내 ‘미군 점령 지역’으로 확대됐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도 이 같은 통금령은 시간대를 조금 달리하는 방식으로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그리고 6.25 전쟁(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4월 내부부장관 고시를 통해 법제화됐다.

위반시 유치장 입감 및 현재 기준 3만원 범칙금

통금 시작 시간엔 사이렌이 울리며 통금을 알렸다. 경찰들이 통금 시간을 넘어 길거리를 걷는 시민들을 단속했고, 적발될 경우 경찰서 유치장에 밤새 구금됐다가 이후 즉결심판에 회부돼 적지 않은 범칙금을 내야 했다. 1979년 범칙금은 2000원으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만원 이상이다. 야간 통행증이 있어야만 범칙금을 피할 수 있었다.

군사정권에서 일시적 통금해제는 정부의 선심 정책으로 시행됐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쿠데타 1주년을 맞아 1962년 5월을 ‘관광의 달’로 지정하고 16일 간 통금해제를 시행됐다. 정부수립 후 첫 장기 통금해제였다. 그해 연말에도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새해 1월 3일까지 11일 간 두 번째 장기 통금해제를 시행했다.

당시 야당이던 민정당(신군부 민주정의당과 다른 정당)에서 1964년 1월 전국적인 통금 폐지 건의안을 발의했고 그해 2월 국회는 ‘조속한 시일 내에 점진적 통금 폐지’를 내용으로 건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1964년부터 일부 지역에 한해 통금이 폐지되기도 시작했다.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던 제주도가 1월 처음 통금이 완전 폐지된데 이어 2월엔 울릉도, 이듬해 3월엔 내륙지역인 충청북도의 통금이 폐지됐다.

통금 폐지 첫날 밤인 1982년 1월 6일 자정을 넘은 시간 서울 도심 모습. 호기심에 나온 시민들로 가득하다. (사진=연합뉴스)
1962년 ‘5.16 1주년’ 첫 장기 통금 해제

그리고 1965년엔 매년 12월24일 자정부터 25일 새벽 4시까지, 12월31일부터 1월1일 새벽 4시까지 통금을 실시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크리스마스와 연말 야간엔 도심 곳곳이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됐다.

그 이후에도 점차 통행금지는 부분 폐지됐다. 국가적으로 수출에 총력을 기울이던 1966년 4월 화물차의 통금을 폐지했고, 5월엔 5개 관광도시와 울산 등 공업도시 일부의 통금이 사라졌다.

1967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박정희정권과 공화당은 민심 달래기 차원에서 통금 폐지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으나 선거 이후 흐지부지 됐다.

통금폐지는 신군부 등장 이후에야 이뤄졌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국가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는 집권 후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추진한 이른바 ‘3S(섹스, 스포츠, 스크린)정책’의 연장선으로 통금 폐지를 실시했다.

통금 폐지안은 1981년 처음 국회에서 나왔다. 민주정의당의 위성정당이었던 한국국민당이 1981년 11월 초 통금폐지 건의안을 발의했고, 민정당도 여기에 가세했다. 민정당 등은 한 달 후인 12월 국회 본회의에서 통금폐지 건의안을 통과시켰고, 정부도 ‘조속한 해제’를 약속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통금해제 건의안 국회 통과 후 국회 리셉션에 참석한 자리에서 국민당의 통금해제 건의안에 대해 “좋은 발의를 했다”고 격려하기도 했다.

1982년 1월 초 거의 대부분 지역의 통금이 폐지된데 이어 통금이 유지되던 1988년 1월 휴전선 인접지역까지 통금이 해제됐다. 다만 비무장지대(DMZ) 내에 있는 대성동 내에선 여전히 통금이 시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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