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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닭을 데려다놨을 뿐 생각은 그대들이 하시오"

오현주 기자I 2018.08.27 00:12:00

갤러리현대 이강소 '소멸' 전
닭·선술집·굴비·갈대 등 소재로
1970년대 파격실험작품 옮겨와
생명·실존 등 근본의문 던지고
"상상·판단은 관람객의 몫"으로

한국실험미술의 1세대 작가인 이강소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 1970년대 자신의 대표작을 재현한다. 살아있는 닭이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횟가루 위에 남긴 흔적을 좇게 한 ‘닭 퍼포먼스’(2018)는 그중 가장 시선을 끄는 작품. 1975년 제9회 파리비엔날레에 내놨던 ‘무제-75031’를 옮겨왔다. 닭은 사흘만 갤러리에 머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하얀 덩어리가 꿈틀대는 듯했다. 설마, 현실감 넘치는 설치작품이겠지. 하지만 ‘내 멋대로의 단정’이 빗나가는 데는 수초가 걸리지 않았다. 움직이는 그것이 그대로 눈에 꽂혔으니까. 허연 물체는 뽀얀 털을 가진 닭이었다. 누군가 귀띔한다. ‘청계’라고. 푸른빛이 도는 알을 낳는 닭이라고. 그러든가 말든가. 오른쪽 발목을 느슨하게 묶인 닭은 참으로 무심하다. 닭과의 눈맞춤을 갈구하는 이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에 열중할 뿐. 횟가루가 뿌려진 자신의 영역을 순회하며 ‘영역 만들기’에 몰두 중이다.

#2. ‘낙지볶음 조개탕 돼지갈비 생태찌개’가 크게 적힌 입간판이 섰다. 등 없는 나무의자와 같은 재질의 탁자 위에는 막걸리주전자, 재떨이, UN성냥통 등이 보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벽에 붙은 빛바랜 사진액자가 공간을 대신 설명한다. 여긴 술집이구나. 얼추 비슷한 사진 속 소품이 사진 밖으로 척 나와 있는 걸 보니 이미 오래전 사라졌을 옛 장소를 재현하자고 한 건가 보다.

현대미술가 이강소가 1970년대 자신의 대표작을 재현한다. 나무탁자와 의자, 메뉴를 적은 입간판 등을 들여 실제 술집을 차려낸 ‘소멸’(2018)은 1973년 서울 중구 YWCA 지하 명동화랑에 ‘전시’했던 ‘소멸’(선술집)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탁자와 의자는 2001년에 다시 제작한 것이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종로구 삼청로길 갤러리현대. 경복궁 담벼락을 마주한 이 ‘점잖은 공간’에 예상치 못한 장면들이 ‘떴다.’ 비단 닭과 술집만이 아니다. 전시장은 알 듯 모를 듯한 ‘퍼포먼스’로 가득하다. 잘 자란 갈대를 뭉텅 잘라와 세워두질 않았나, 검은 판에 길게 엮은 굴비를 늘여놓질 않았나. 가마니에 펼쳐둔 사과 한무더기도 눈에 띈다. 굳이 왜?

이 모든 ‘당황스러운’ 그림을 연출한 이는 원로작가 이강소(75). 그는 한국실험미술의 1세대 작가다. 전시는 바로 그가 45년 전쯤 이미 벌인 전시이벤트를 다시 소환해놓은 것이다. 타이틀인 ‘소멸’은 1973년 첫 개인전에 냈던 작품 ‘소멸’(선술집)에서 따왔다. 1970년대를 복원한 자리. ‘응답하라 1970’쯤 된다고 할까.

△선술집·굴비·닭…1970년대를 뒤흔들다

시간을 되돌려보자. 1973년 서울 중구 명동 YWCA 지하 ‘명동화랑’. 첫 개인전을 앞두고 골몰하던 서른 살의 젊은 작가 이강소는 자신에게 가장 친밀한 공간 ‘선술집’을 ‘전시’하기로 한다. 당시 한 주점의 탁자와 의자를 죄다 사들인 뒤 화랑으로 옮겨왔다. 메뉴가 적힌 입간판은 무교동 길거리에서 주어왔고. 모양만 본뜬 게 아니었다. 전시장은 진짜 술집이 됐다. 이강소의 ‘작품’을 보러 들른 관람객들은 얼떨결에 100원을 내고 탁주 한 잔씩 받아 마시며 기꺼이 이 작가 개인전의 소품이 돼 줬다.

작가 이강소가 1973년 명동화랑에 차린 선술집 전시 퍼포먼스 ‘소멸’을 담아낸 현장사진 앞에서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소멸’은 이 작가가 서른 살에 연 첫 개인전 출품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45년 전 ‘소멸’ 전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파격’이었다. 그림이며 조각이나 들어차야 할 장소에 술판을 벌여놨으니 과연 이것을 작품이라 할 수 있겠나. 그런데 이는 바로 작가가 의도한 것이니. 일상의 막걸리집을 관람객이 직접 경험해보란 ‘지시’였던 거다. “담뱃불에 타버린 자국, 뜨거운 냄비바닥이 만든 문양. 이들만 보고도 상상할 수 있지 않겠나. 세계는 다 다르다. 각자가 생각하기에 따라.” 개막을 앞둔 전시장에서 만난, 이젠 70대 노장이 된 이 작가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멍석을 깔아뒀으니 보는 이들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은 당신들의 몫’이란 작가의 철학은 이후에도 한결같이 이어졌다. 1975년 제9회 파리비엔날레에 내놨던 ‘닭 퍼포먼스’도 그 연장선상. ‘무제-75031’이란 제목의 작품은 닭이 횟가루를 뿌려둔 반경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찍어댄 발자국으로 그 흔적을 짐작케 한 것이다. 닭은 사흘 정도 전시장을 휘젓다가 사라졌는데 이를 두고 벌인 관람객의 분분한 의견·질문·반응까지 모두 작품이 됐다. 당시 프랑스 정규뉴스프로그램에까지 방송될 만큼 화제였다는 작품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뿌린 생명력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었던 셈. 43년 전에 그랬듯 당시를 재현한 이번 전시에서도 닭은 곧 전시장을 퇴장한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게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암시만 하는 것”이라니.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닭 퍼포먼스 ‘무제-75031’. 닭은 사흘 정도 전시장을 휘젓다가 사라졌는데 이를 두고 벌인 관람객의 분분한 의견·질문·반응까지 모두 작품이 됐다(사진=갤러리현대).


검은 판 위에 한 줄로 엮인 ‘굴비’도 다르지 않다. 1972년 ‘제3회 아방가르드(AG) 전’에 선보였던 작품은 당시의 현실을 은유한 것. 온통 허무하고 답답하기만 한 세상을 표현한 ‘검은 관’, 그 위에 놓인 ‘굴비’란 결국 생존의 문제와 연결됐을 터. 다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간 한 마리가 결국 미술관 직원의 술안주가 됐더란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숨통을 틔운다. 이번 전시에서 그 한 마리는 분필로 윤곽선을 딴 그림으로 나왔다.

작가 이강소가 작품 ‘굴비’(2018)를 설명하고 있다. 1972년 ‘제3회 아방가르드(AG) 전’에 선보였던 작품은 당시의 허무하고 답답한 현실을 은유한 것이다. 흰 분필로 그려넣은 그림은 당시 술안주로 뽑혀나갔던 굴비가 묶여 있던 자리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외에도 낙동강변의 갈대를 흰 석고와 시멘트로 굳혀 ‘박제된 자연’을 의도한 ‘여백’(1971년 ‘제2회 AG전’ 출품), 전시장 한 귀퉁이에 가마니를 펼쳐놓고 1개에 50원씩 팔았다는 사과 퍼포먼스 ‘생김과 멸함’(1974년 ‘한국실험작가전’ 출품) 등. 작가는 전시작 10여점으로 격정의 한국현대미술사를 거스른다.

이강소의 ‘여백’(갈대)(2018). 낙동강변 갈대를 꺾어다 흰 석고와 시멘트로 굳혀 ‘박제된 자연’을 의도한 작품은 1971년 ‘제2회 아방가르드AG전’에 출품했던 것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강소의 ‘생김과 멸함’(2018). 돈을 지불하고 사과를 가져가든 그저 작품으로만 감상하든 전적으로 관람객의 선택에 따른다. 1974년 대구에서 연 ‘한국실험작가전’에 등장했을 당시에는 1개당 50원씩에 팔았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무엇을 보든 틀릴 게 없는 ‘상상력’ 동원

이 작가가 대중성을 얻게 된 건 ‘오리작가’라 불리면서다. 그가 그린 추상회화 속 형상이 오리처럼 보인다 해서 붙은 별칭이다. 하지만 이 작가의 영역을 ‘오리’로만 한정하는 건 대단히 섭섭한 일이다. 실제로 그는 한국현대미술을 주도한 다채로운 실험으로 시대를 출렁였으니까. 전통적인 회화·조각·판화는 물론 실험성이 도드라진 설치·퍼포먼스·비디오·사진 등으로 굵고 강렬한 궤적을 그어왔다. 혼자만의 작업도 아니었다. 동료와 선후배 예술가를 자극하고 추동하는 역할까지 기꺼이 담당했던 거다. 고뇌를 원하는 세상에는 고뇌로 맞받아치고, 실존을 따지는 시대에는 실존을 내보였으며, 위로를 원하는 시절에는 위로를 꺼내놨다. 세월을 되돌린 이번 전시의 취지가 여기에 있다. 단답식 정의, 정해진 규정을 비켜나 이면을 꿰뚫어보라는 거다. 딱딱한 머리와 메마른 가슴을 말랑하게 하는 ‘한방’을 숨겨둔 셈이다.

이강소의 추상회화 ‘생성-17090’(2017). 오리처럼 보이는 그림 속 형상 덕에 작가에겐 ‘오리작가’란 별칭이 생겼다. 대중성은 얻었으나 대신 실험성이 묻혔다. ‘소멸’ 전은 그 아쉬움을 터는 자리. 한국현대미술을 주도해온 작가의 실험정신을 다시 꺼낸다. 이번 전시에선 볼 수 없는 그림이다(사진=갤러리현대).


결국 “우리가 보는 세상은 환상”이란다. 그러니 무엇을 보든 틀릴 것도 없다는 게 이 작가의 판단이다. 내키는 대로 상상하라고, 설사 인정을 받든 못 받든 아쉬울 건 없다는 그이다. 그래서 결론은? 닭이든 술집이든 굴비든 “난 가져다놨으니 생각은 그대들이 하시오”다. 전시는 9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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