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한 고위인사는 비상계엄 사태 이후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40원에 육박할 정도로 치솟는 9일 이데일리에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기업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걱정이 있다”며 이렇게 토로했다. 수출 비중이 높은 만큼 환율 상승이 호재로 작용하는 측면이 일부 있지만, 한국 경제의 리스크로 비화할 경우 오히려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환율 1500원 뉴노멀 열어둬야
실제 국내 주요 기업들이 추산하는 원·달러 환율 상승 여파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환율 변동을 감안해 추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는 올해 3분기 기준으로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할 경우 5797억원의 세전이익이 있을 것으로 봤다. 반도체 외에 스마트폰, TV, 가전 사업 등을 함께 하는 삼성전자 역시 환율이 오르면 세전이익이 다소 늘어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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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는 주로 국내 생산이 많고 해외에 수출할 때 달러화로 받는 산업이다. 이로 인해 환율이 오르면 원화로 환산한 이익은 더 증가할 여지가 있다. 삼성전자가 오는 2026년 가동을 목표로 17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는 점은 변수이지만, 국내 생산량에 비하면 큰 수준은 아니다. SK하이닉스의 인디애나주에 어드밴스드 패키징 공장 건설은 아직 삽을 채 뜨지도 않았다.
게다가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 달러화, 유로화 등 총 32개 통화에 대해 4876건의 통화선도 거래(Currency Forward·미래의 특정시점에 계약된 통화를 사거나 파는 것)를 체결하는 식으로 환 헤지에 나서고 있다. 다른 대기업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같은 관측은 어디까지나 통상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해외에서 수입하는 원자재, 웨이퍼 등의 가격이 오를 수 있는 점은 리스크”라며 “그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국가 브랜드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실제 금융시장에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볼 수 없던 레벨인 원·달러 환율 1500원대까지 열어둬야 한다고 보고 있다. 원화 가치가 15년여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기업들이 발행한 채권 등에 투자를 꺼리면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수 있다”며 “유동성 위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국가 브랜드 하락 리스크 불똥
미국 투자 규모가 큰 배터리업계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LG에너지솔루션(373220), 삼성SDI(006400),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미국 내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보조금을 받기 위해 현지 투자를 대폭 확대해 왔다. 그만큼 부채도 늘었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에서 환율이 폭등하면 돈을 더 빌리지 않아도 원화 환산 부채 규모는 늘어나는 탓에 재무구조는 악화할 수밖에 없다. 올해 3분기 기준으로 LG에너지솔루션이 가진 달러화 자산 규모는 4조4397억원, 부채는 6조8284억원이다. 달러화 부채는 이미 지난해 말(4조2179억원)보다 61.9% 늘었는데, 추후 더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LG에너지솔루션이 추산한 환율 10% 상승시 세전손실 규모는 2389억원이다.
삼성SDI는 올해 3분기 외화 환산 손실은 약 917억원, 수익은 92억원으로 각각 집계됐다. 현재 환율이 뛴 것을 감안하면 이번 비상계엄 사태로 손실 규모는 더 불어났을 것으로 전망된다. SK온 역시 환율이 5% 상승하면 176억원가량의 손실이 있을 것으로 봤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미국 투자를 많이 한 만큼 환율이 급등하면 원화 환산 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원유를 수입하는 정유업계 역시 고환율은 큰 부담이다. 원유를 100% 수입해 정제한 후 석유제품으로 판매하는 만큼 환율이 오르면 원유를 사들일 때 환차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철강재 생산에 필요한 철광석과 제철용 연료탄 등의 원재료를 수입하는 철강업계도 마찬가지다. 환율 상승에 따라 원가 부담이 늘어나는 와중에 글로벌 경기 둔화 영향으로 철강 수요가 줄어들면서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온전히 제품 가격에 반영하기 어려운 만큼 손실은 불가피해졌다. 그나마 선박 계약과 대금 결제를 달러화로 받는 조선업계 정도가 고환율이 호재로 작용할 수 있지만, 이 역시 국가 브랜드 저하 리스크에 맞닥뜨릴 경우 추후 여파를 예측하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다. 비상계엄 사태의 전개 방향 자체가 예측 불가능한 데다, 그렇다고 바이든 행정부 이후 확대한 미국 사업을 다시 접는 것은 리스크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재계 고위관계자는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그때그때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점 외에는 방법이 거의 없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