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용 전장(전자장치) 사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며 하만을 9조원에 인수해 미래 성장동력으로 만들었고, 자율주행에 대한 인식을 높여 전용 투자 펀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핀테크, 가상화폐, 빅데이터 등 삼성전자가 추구하는 새로운 사업 방향에는 이 부회장의 활발한 출장이 있었다. 유럽에서는 피아트크라이슬러(FCA) 그룹의 지주사 엑소르의 사외이사를 맡아 자동차 산업에 대해 직접 들여다볼 수 있었고, 중국에서는 동방의 다보스포럼으로 불리는 ‘보아오포럼’ 상임이사를 맡고, 미국에서는 세계 유수의 IT 리더와 투자자들이 모이는 선밸리 컨퍼런스에 참여하며 삼성과 한국 경제의 미래를 고민하고 모색해왔다.
하지만 3일 전해진 이재용 부회장의 보아오포럼 상임이사 퇴진 소식에 재계가 탄식하고 있다. 관행적으로 상임이사를 6년간 수행하고 후임자를 추천하며 물러나는데, 이 부회장은 1년을 남기고 조기 퇴진하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민간 외교와 경제협력 통로에 손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 대표’ 민간 외교 통로 손실
이 부회장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구속수감된 후 회의 참석이 어려워지면서 줄줄이 맡은 자리를 내려놓으며 기회를 잃고 있다. 지난해 FCA 사외이사 자리에서 물러난 데 이어 보아오포럼 상임이사 자리도 오는 4월을 끝으로 결국 내려놓게 됐다. 선밸리 컨퍼런스는 아예 참석할 길이 없다. 이 부회장이 삼성을 대표하는 리더이기에 참석할 수 있었던 자리라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물론 리커창 총리나 주요 부처 장관 등 중국 정부 고위층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였고, 심도있는 대화를 이어가며 중국 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는 자리였다. 삼성도 중국을 비롯해 신흥 국가들이 대거 참석하는 보아오포럼 후원사를 맡으며 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민간 외교사절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듯 비단 삼성뿐 아니라 국내 기업 전체를 대표하는 성격을 띠는 자리라는 점에서 더욱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단순 개인 차원 넘어서는 총수의 존재감
한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을 비롯한 대기업 총수들의 존재감은 소위 ‘큰 그림’을 만들 때 더욱 드러난다”고 말했다. 일상적인 경영활동은 전문경영인이 이끌 수 있고, 전략 수립도 가능하긴 하지만, 결국 큰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그룹 총수라는 의미다.
실제로 하만 인수 이후 삼성 계열사들의 대형 인수합병(M&A)은 실종 상태다. 국제적인 사업 거래에 있어 오너의 인맥과 역할은 더욱 절대적이다. 가령 하만 인수를 비롯해 삼성전자가 추진한 대형 M&A 과정에서 대상이 되는 기업 측에서는 경영권 보장 여부 등을 비롯해 여러 가지 사안을 요구하고 협상을 통해 조율하길 원한다. 이런 협상안에 대한 최종 결재권자는 총수다. 특히 가문이 대대로 사업을 영위해 온 기업체를 인수하려 할 때는 총수 일가와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 국가 간 경제협력에서도 역시 총수 개인의 존재감이 양국 간 관계 강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민간 외교 차원에서 볼 때 보아오포럼에서 회원으로서 제 역할을 결국 못하게 된 것이 결국 국가적 손해로 이어졌다”라며 “정치적인 재판에 기업인을 연결해버리면 이런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대표적인 개인 간 관계가 국가 간 관계로 이어지고 사업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재벌 총수에 대한 접근은 지금보다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우리나라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도 선수 출신 외에 경제계에서는 지난해 사임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후임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