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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우리 때만 해도 작가에게 출신 학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난 예술교육을 믿지 않는다. 소설을 쓰는 일은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소설의 기본 요소는 서사, 바로 이야기다. 1990년대 이후 문예창작과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게 참 웃기는 현상이다. 문창과는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다. 서사는 모자라고 세계관은 안 되고 철학은 없다.”
길 잃은 한국문학은 어디로 가야 할까. 신경숙 표절파문 이후 해법 없는 논란은 물론 일본작가의 득세 등으로 한국문학은 위기에 처했다. 최근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한국의 시·소설 등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소설가 황석영(72)이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다. 지난주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교보빌딩에서 연 ‘교보인문학석강’ 강연자로 나선 자리에서였다. 문예창작과 출신 위주의 글쓰기 관행을 꼬집으며 서사의 힘을 강조했다. 철학·시선의 복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3가지 키워드로 짚어봤다.
◇철학의 부재…“한국문학 이 꼴 된 것은 문창과 때문”
황석영은 우선 문예창작과 출신이 주도하는 한국문학의 현실에 일침을 가했다. “오늘날 한국문학이 이 꼴이 된 것은 대학의 문예창작과 때문이다. 문창과는 글 쓰는 기술만 가르치는 곳”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는 국내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 공모를 문창과 출신이 주도하고 있다는 현상을 비난한 것이다. 황석영은 “문창과 출신의 글은 다 무난하다. 문장도 구성도 좋고 기본 점수가 된다”며 “반 고흐의 그림이 감동을 주는 것은 자기인생을 투여했기 때문이다. (신춘문예 본선에) 10편이 올라오면 다 똑같다. 신춘문예 심사는 지루해서 못 하겠다. 안 한 지 10년이 넘었다”고 말했다. 이어 “서사가 딸리니까 햇볕이 들어오는 과정만을 묘사한다. 그 장면은 치열하고 섬세하다. 나뭇잎에 비가 어떻게 떨어져서 구르고 떨어지고. 한마디로 주접을 떨고 있는 것”이라면서 불편한 심경을 밝혔다.
◇서사의 복원 …“이야기 자체가 아름다움”
황석영의 해법은 문장이 아닌 서사였다. 이야기가 아름다우면 되는데 요즘은 세세한 문장 표현에만 너무 집착한다는 것이다. 특히 “소설은 첫 제목부터 마지막 문장의 구두점을 찍을 때까지 전체의 컴포지션(구성) 안에 미학이 총체적으로 들어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젊은 작가들의 가장 큰 약점은 체험의 강도, 다시 말해 서사가 약하다는 것이다. 작품 뒤에는 작가가 이전에 본 텍스트의 그림자가 다 보인다. 텍스트는 자기 체험의 필터와 용광로에 녹여서 다시 내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인생을 살아가는 사정에 대해 알아야 한다.”
황석영은 경험과 체험을 강조했다. 스스로도 ‘작가로서의 삶과 작품을 가능하다면 일치시키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젊은 시절 남도를 방랑하면 만났던 산업화 초기 부랑자, 떠돌이 작부, 도시빈민, 농민 등은 초기 중단편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순수·참여문학에서 상찬을 받았던 ‘삼포가는 길’의 경우도 원고료를 받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마감 전날 연락을 받고 하룻밤 만에 썼다는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풍부한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 청년시절이던 그의 1960∼70년대는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이후 전국의 노동현장을 떠돌아다닌 일, 신체검사를 기피했다가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뒤 베트남전쟁에 끌려간 일, 문단 활동을 접고 위장취업 1세대로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구로공단에서 활동한 일, 전라도에서 농민·노동자와 현장문화운동을 전개한 일 등등.
◇시선의 제시…“한국문학이 지금 해야 할 역할”
한국문학의 당면과제는 무엇일까. 황석영은 한국문학의 역할과 관련해 “한동안 작가가 현실과 결부된 글을 쓰면 낡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며 “한국문학이 지금 사회에 해야 하는 역할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시선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경제·정치·사회체제에는 나선형 통로라는 게 있는데 문학에서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문학은 들여다보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담아낸다. 우리도 과거에 지나온 시대를 제대로 되돌아봐야 한다.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그때야말로 그런 시선이 필요했다. 이런 것들은 문학이 응원해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 전국어린이글짓기대상에서 상을 받고 신문에 글이 실리면서 작가를 꿈꾼 황석영. 1962년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등단한 지 50여년이 흘렀다. 황석영은 “분단시대에 서서 한국의 근대와 그 이후 세대를 잇는 다리가 되고 싶다. ‘그 시대의 산문은 황석영’이란 말을 듣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아울러 “조만간 신작을 마무리해서 출간할 예정”이라며 “내 나이 일흔이 넘었다. 올해 안으로 담배도 끊을 생각인데 눈앞이 깜깜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