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착한 일본군 끌어안는 더 착한 조선인이라…

오현주 기자I 2012.06.22 12:07:51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

일제 말 한일 적대관계 넘어 소통가능성 노래
`야키니쿠 드래곤`의 재일교포 정의신 새 연극
정태화·서상원·고수희·염혜란… 폭발적인 연기력 과시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6월 22일자 44~45면에 게재됐습니다.

▲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사진=남산예술센터)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나는 귀신입니다. 이제부터 얌전히 잠을 잘게요.” 이발사 홍길이 쑥스러운 듯 자기소개를 한다. 이윽고 이발의자에 편하게 자리잡자 그의 뒤로 어렵게 발걸음을 떼는 한 노파가 등장한다. 그리곤 슬리퍼 한 짝을 벗어들더니 냅다 홍길의 뒷통수를 후려친다. 부인 영순이다. “그만 저승으로 가시면 어떻겠소? 저승서 차분하게 기다리소. 곧 따라갈테니.” 들은 척 만 척 홍길은 이발소 구석구석을 돌며 잔소리가 끝이 없다. 그러다 부부는 동네에 관광객 늘어난 얘기, 호텔 들어선 얘기로 그리움과 탄식이 섞인 회한에 젖는다. “그랑께라. 어제일 같으오.”

그렇게 돌아간 과거 한 장면에선 그들의 네 딸 중 셋째 미희의 결혼식이 한창이다. 여기는 외딴 섬마을 `홍길이네 이발소`. 1944년 일제의 발악이 정점으로 치닫던 종전 직전이다. 둘째 선희를 주축으로 딸들이 즉석에서 결성한 `음란 시스터스`가 `까투리타령`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던 중 일본군이 몰아닥친다. “오늘 5월9일부로 당 이발소를 군 관할 하에 둘 것을 명한다.” 축제는 끝났다.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가 공연계에 다시 휘몰아쳤다. 재일교포 2세 작가 정의신(55)의 신작이다. 극을 쓰고 연출했다. 정의신은 그간 `야키니쿠 드래곤`(2008), `적도 아래의 맥베스`(2010), `쥐의 눈물`(2011) 등을 차례로 소개하며 존재를 각인시켜왔다. 이번 `봄의 노래…`는 일제강점기 한 가상의 공간에서 조선과 일본인들이 소통하고 화해하는 내용을 다뤘다. 전작 `야키니쿠…`의 골격을 가져왔지만 `야키니쿠…`가 1970년대 일본이란 환경 속에서 차별받는 한국인의 상처를 드러냈던 것과는 다른 모색이다.

정의신 극의 특징은 포장 없는 정교함에 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조차 일상처럼 서서히 스며든다. 그 저력은 `봄의 노래…`에서도 빛을 낸다. 고달픈 삶에서 희망을 말하는, 척박한 시점을 펼쳐놓고 체념하지 말라는, 아픔과 슬픔을 교차시키며 웃어라 하는 그런 거다. 유머와 엄숙을 오가는 흡입력. 그것이 그의 장기다. 그런데 문제의식까지는 아니다. 착한 일본군을 끌어안는 더 착한 조선인이란 설정 때문이다. 그에게 역사는 무엇인가.

▲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사진=남산예술센터)

물론 여기엔 정의신의 가족사가 작용한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일본군 헌병이었다. 그 죄책감에 아버지는 50여년 동안 고향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작품은 역사에 휩쓸려 의지와 무관하게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뉜 채 살아야 했던 이들의 상처를 드러낸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극 중엔 어쩔 수 없다기보다 큰 고민없이 일본과 타협하며 사는 섬사람들이 그려진다. 지뢰로 오른쪽 다리를 잃은 일본군 중좌 시노다에게 손을 내미는 건 왼쪽 다리를 저는 첫 딸 진희다. “언젠가 한국과 일본의 사이가 좋아져 서로 오가고 할 때까지 기다려 주실라요” 했다. 얼마 전 막내 정희가 중요정보를 누설한 혐의로 일본군에 체포되던 중 총탄에 희생됐던 터다.

깊이 패인 서사는 있으나 인물들의 반감은 없다. 그 이유는 이들이 만든 세상이 다분히 비현실적인, 마치 꿈같은 이상향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폭로해야 할 사건보다 보듬어야 할 사연이 많고, 비애는 있되 좌절은 없다.

정태화·서상원·박수영·고수희·염혜란 등 `정의신 사단`으로 불리는 배우들이 누구랄 것 없이 뚜렷한 개성과 역할로 극을 메운다. 한두 차례 연극상을 석권한 배우들이다. 이들 전부가 무대에 나와 한바탕 난장을 펴는 장면들이 백미다. 미희의 결혼식, 정희가 체포될 때, 진희와 시노다가 앞날을 약속한 순간. 정의신 만의 탁월함은 여기에 있다. 죽은 딸 생각에 어머니가 오열하고 있는 옆에서 `까투리타령`을 다시 불러대며 객석을 웃기는 역설적 풍경. 그의 작품은 가장 웃길 때 가장 슬프다. 7월1일까지 서울 예장동 남산예술센터. 02-758-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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