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낙하산 인사 근절이라는 화두는 역대 정권의 `영원한 숙제`였다. 김대중 정부는 `개혁`을, 노무현 정부는 `혁신`을 기치로 내걸고 낙하산 인사의 관행을 뿌리 뽑겠다고 공언해왔지만 결과적으론 모두 `용두사미`로 끝났다.
이명박 정부 역시 지난 2년간 6차례에 걸쳐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인사혁신 ▲보수체계 개편 ▲노사관계 개선 등 소프트웨어 측면의 변신을 시도해왔다.
그러나 정부 산하 공기업들의 인사 관행을 면밀히 살펴보면 현 정권이 야당 시절 `코드 인사`라고 비판했던 관행, 즉 전직 국회의원이나 선거 낙천·낙선 인사 등이 공기업 사장이나 감사, 이사 등으로 옮겨가는 바로 그 부정적인 관행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물론, 일부 인사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성과 추진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대부분은 업무의 연관성 없이 논공행상식으로 이리저리 자리를 꿰찬 상태다.
전문가들은 "낙하산 인사의 답습으로 기관장들이 무사안일주의와 적당주의에 안주할 경우 해당 기관의 경영 효율성은 약화되고 직원들의 사기는 저하된다"며 "공공부문 인사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MB의 '6개월룰'도 공염불
현 정부 들어 낙하산 인사 문제는 이명박대통령과 학연, 지연 등으로 얽힌 측근그룹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류철호 한국도로공사 사장, 양휘부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김종태 인천항만공사 사장 등이 청와대와 정부 당국 등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취임 초 낙하산 인사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금융감독원의 퇴직 관료들이 금융회사의 감사로 갑자기 옷을 갈아입거나, 지식경제부, 농림수산식품부, 환경부 등 정부 각 부처의 간부들이 산하 공기업이나 유관 단체 등으로 자리를 옮기는 구태도 반복됐다.
2009년 국감에서는 2004년 이후 5년간 퇴직한 4급 이상 환경부 공무원 49명중 45명이 산하 공공기관과 단체에 재취업한 사실 등이 확인됐다. 당시 박대해 한나라당 의원은 "산하 기관이나 단체로 자리를 옮긴 퇴직 공무원의 대부분은 `친정` 격인 행정부처에 인맥을 내세워 감사 기능을 약화시키거나 예산을 따오는 로비스트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총선 직후인 지난 2008년 4월 "낙천·낙선자들은 최소 6개월간은 공기업이나 정부 산하단체에 기용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몇 개월도 되지 않아 총선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떨어졌거나 공천을 받지 못해 불출마한 인사들이 속속 공기업으로 자리를 찾아가면서 이른바 `6개월 룰`은 문자 그대로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정형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과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전용학 한국조폐공사 이사장, 이이재 한국광해관리공단 이사장, 김석준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임인배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 김광원 한국마사회장, 홍문표 한국농어촌공사 사장, 이성권 코트라(KOTRA) 상임감사 등은 이 대통령의 '6개월 룰'을 정면으로 거스르면서 공기업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간 '힘 있는 인사'들이다.
◇노조와의 야합, 경영실적 부진
낙하산 인사를 통해 공기업의 핵심보직을 꿰차고 있는 전직 관료들 중엔 기존의 전문성을 살려 해당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기관장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은 낙하산 인사라는 태생적 한계로 기본적인 경영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게 관련 당사자들의 전언이다. 대표적인 예가 노조와의 관계다.
한국조세연구원 공공기관정책연구센터가 지난해 '공공기관 선진화를 위한 정책과제' 보고서를 통해 공개한 감사원의 공공기관 감사 자료에 따르면, A기관은 2006년 12월 노조의 요구로 전 직원에게 일률적으로 5시간씩의 시간외 근무 수당을 지급, 18억여원의 예산을 허비했으며, B사는 전임 사장과 노조 간의 합의사항이란 이유로 징계나 주의, 경고 등의 처분을 받은 직원 281명에 대해 규정에도 없는 사면을 실시하기도 했다.
한 퇴직 공기업 임원은 "공무원이든 정치인 출신이든 낙하산으로 가서 회사를 잘 이끄는 경우도 있지만, 낙하산으로 가면 대개 노동조합부터 `선물`로 달래야 하는 게 현실"이라며 "노조의 요구에 떼밀려 이면계약 등을 통해 과도한 복지혜택을 부여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낙하산 인사들의 경영실적도 그다지 신통치 않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기획재정부가 올해 발표한 `2009년 공공기관장 경영평가`에서도 60점 이하를 받은 20개 기관의 전·현직 기관장 23명 중 정치권과 직·간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인사가 12명, 그리고 정부 부처 관료 출신 인사가 4명인 것으로 파악됐다.
한 공기업 임원은 "낙하산 인사로 내려온 본인들 또한 `임기 3년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에 장기적인 비전보다는 단기적인 성과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그런 암묵적 관행이 지난 수십년간 누적된 결과가 바로 지금의 공기업"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인사문제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 선행돼야"
물론 정부는 이같은 부작용을 막기 위해 각종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재정부는 각 기관장들의 노조 눈치 보기를 뿌리 뽑기 위해 올해부터 모든 공공기관 노사가 맺은 단체협약의 개정 사항을 공공기관 정보공개 시스템에 수시로 공개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 당국의 지속적인 제도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공부문의 인사와 재정을 `전리품`으로 취급하는 정치권의 인식과 정부 부처 퇴직 직원들에 대한 전관예우 관행 등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낙하산 시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무분별한 낙하산 인사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도 필요하다. 현행 공직자윤리법과 시행령은 공무원의 경우 퇴직일로부터 2년 동안 퇴직 전 3년 이내에 소속했던 부서 업무와 관련이 있는 민간 기업에는 취업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자본금 50억원 이상이며 외형거래액이 연간 150억원 이상인 기업체` 등만을 취업 제한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어 이 같은 낙하산 시비를 차단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공모제를 하더라도 사전 내정설이 흘러나오고 있고 공직자윤리법을 강화하더라도 회피할 방법이 많은 게 현실"이라며 "사회 전반의 수준이 개선되지 않고선 공기업에 대한 낙하산 시비가 제대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는 "공기업 개혁은 깨끗하고 검증된 최고경영자(CEO)를 선임하고 그 CEO가 스스로의 문제를 도려내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정부의 공기업 개혁이 성공하려면 인사 문제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부터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