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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쓰, 섬으로 가는 문화의 관문
가가와현의 현청 소재지이자 세토내해 연안의 중심 도시 다카마쓰. 세토우치 예술제를 만나기 위한 첫 발걸음은 이 도시에서 시작된다. 다카마쓰역 앞 항구에서 출발하는 배는 메기지마와 오기지마를 잇는 여정의 출입문이다. 항구 인근에는 현대미술관과 상점가, 전통 시장이 어우러져 도시 자체가 예술의 연장선이다. 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조차 풍요롭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도시의 리듬을 가슴에 새긴다. 세토내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도심 속 정원 리쓰린 공원도 이곳의 또 다른 명소다.
다카마쓰에는 지역 예술과 문화를 소개하는 다양한 체험형 공간도 마련돼 있다. 유서 깊은 다카마쓰 성터, 오랜 역사를 간직한 상점가, 전통 수공예를 전시하는 문화센터가 조화를 이룬다. 거리 곳곳에는 ‘다카마쓰 예술 워크’라 불리는 프로젝트 작품들이 자리한다. 조형물부터 벽화, 참여형 인터랙티브 예술까지 다양한 작품이 도시 속 일상에 스며든다. 예술제의 중심이 섬에 있지만 그 출발은 도시의 일상 속에서 시작된다. 다카마쓰는 단지 환승지가 아닌 여정의 일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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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 항해 끝에 도착한 오기지마 선착장. 첫인상은 낯설지 않다. 순백색 곡선 건축물 ‘오기지마의 혼’이 시선을 끈다. 세계 각국의 문자를 조합한 타원형 지붕과 투명한 유리 벽면. 안내센터이자 예술작품이다. 이곳에서 여행은 시작된다.
골목마다 펼쳐진 조형물, 담벼락에 새겨진 고래 도자기, 폐가를 개조한 창작공간. 섬은 그 자체로 미술관이다. 작품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다락방과 정원과 담벼락 너머에 숨어 있다. 그래서 천천히 걸어야 한다. 한 집은 천장이 통째로 뚫린 구조물 안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다른 집에는 반투명 천으로 벽면을 감싼 조형물이 있다. 조용한 마을과 조응하며 살아가는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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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지마에는 편의점이 없다. 자판기도 드물다. 대신 조용한 찻집과 골목의 텃밭이 있다. 산책 중 우연히 들어간 민가 앞 작은 매점. 조용한 웃음과 손짓으로 여행객을 반기는 모습이 인상 깊다.
돌계단을 오르다 지붕이 낮은 흰 벽의 건물 앞에서 멈췄다. 내부에 설치된 거울 조형물은 섬 바깥 풍경을 반사해 안과 밖의 경계를 지운다. 이 섬의 예술은 그렇게 공간과 시간을 흘려보낸다. 타카하시 아유미의 ‘시라이토노이에’처럼 전통적 공간을 섬세하게 해석한 작품도 있다.
코헤이 나와의 ‘아미모노’는 낚시망 구조물을 모티프로 한 설치물로, 섬의 어업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다. 길목마다 놓인 조형물은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여행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관광지라기보단 생활과 예술이 조용히 공존하는 공간. 그것이 오기지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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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지마, 신화 위에 쌓은 감성의 지층
오기지마에서 20분 거리. 메기지마는 더 서정적이다. 도깨비 전설, 오니의 고향이라는 설화를 품은 섬이다. 실제로 정상에는 동굴이 있다. 지금은 미디어아트가 동굴을 채운다. 빛과 소리의 파장 속에서 신화는 현재로 재생된다.
해변에는 거대한 석상과 설치미술이 놓여 있다. 바닷가 바위 위와 낙엽 아래와 오래된 항아리 안에도 작품이 있다. 골목은 좁고 낮다. 작은 마당마다 조용한 미학이 깃들어 있다.
어떤 집은 창문 전체를 바다 쪽으로 열어두고 창틀에 고래 모양 조명이 걸려 있다. 메기지마에는 폐교를 개조한 갤러리가 있다. 넓은 복도와 오래된 창틀과 교실의 칠판. 예술은 공간의 시간을 보듬는다. 운동장 한 켠에는 섬 아이들과 예술가가 함께 만든 작품들이 설치돼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온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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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지마 항에 들어서면 약 200마리의 갈매기 풍견새가 반겨준다. 기무라 타카히토의 ‘갈매기 주차장’이라는 작품으로 바람의 흐름을 가시화했다. 그랜드 파이노와 4개의 돛으로 구현한 ‘20세기의 회상’은 음악이 바다의 파도 소리와 호응해 섬 특유의 감성을 자극한다.
섬에는 대형 숙소가 없다. 현지 가정집을 활용한 민박이 주를 이룬다. 찾는 사람만 오는 섬. 메기지마의 여행은 빠르지 않다. 걷고 멈추고 바라보는 시간이다. 작은 찻집에서 말차를 마시며 벽에 걸린 손글씨를 오래 바라보았다. 이 섬에선 바다가 먼저 말을 건넨다. 말 대신 파도가 감정을 대신한다.
메기지마의 매력은 감성에 있다. 바람 소리와 풀잎 흔들림과 고양이 발자국. 모든 것이 배경음악이 된다. 작가는 없었고 전시 해설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공간이 이야기였다. 이 섬은 지금도 조용히 예술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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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토우치 예술제는 8월에 다시 열린다. 그래도 섬 곳곳에 남겨진 작품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관람객은 거의 없었지만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마주치는 설치미술과 조형물들이 오히려 더 진한 울림을 전했다. 바다를 향해 열린 창, 낡은 교실의 칠판 위에 남겨진 글귀, 햇살에 반짝이는 유리 조각. 사람 대신 공간이 말을 걸었다. 그 조용한 풍경 속을 걸으며 깨달았다. 여행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에 남는 장면을 천천히 되새기는 일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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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토우치 국제예술제’(Setouchi Triennale)는 일본 세토내해의 작은 섬들을 무대로 열리는 세계적인 현대미술 축제다. 고령화와 인구감소로 활기를 잃어가던 섬마을에 예술을 불어넣어 지역을 재생시키는 실험으로, 2010년 시작돼 3년 주기로 열리고 있다.
올해 예술제는 봄 시즌(4월 18일~5월 25일)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앞으로 여름 시즌(8월 1~31일)과 가을 시즌(10월 3일~11월 9일)이 예정돼 있다. 여행자들은 남은 두 시즌 동안 해안과 섬에 흩어진 예술작품 속에서 보다 깊은 감성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다.
올해는 총 14개 섬과 2개 항구 도시가 참여해 약 100여 점의 예술작품을 선보인다. 대표 지역으로는 나오시마, 테시마, 오기지마, 메기지마, 쇼도시마, 이누지마 등이 있으며 다카마쓰 항과 우노 항도 예술제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한다. 이번 예술제는 ‘바다의 회복’(Restoration of the Sea)을 주제로 자연과 인간, 예술의 공존을 탐색한다. 일부 작품은 지역 주민들과의 협업으로 만들어져 예술이 단지 ‘전시’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일부로 녹아드는 방식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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