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이 적정한 수준인지 검토하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에 정유업을 담당하는 증권가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들이 내놓은 볼멘소리다. 정유사들이 가격인하 압박으로 공급가를 낮추게 되면 전망 보고서를 전부 고쳐써야 하기 때문이다. 전망이 틀렸다는 비난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보고서를 수정하는 수고(?)는 정유사들이 처한 상황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셈. 물가가 오르자 어김없이 기름값 논란이 불거졌고, 이 대통령의 발언과 함께 공정거래위원회는 SK에너지(096770) 등 6개 정유사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정유업계는 이를 `가격인하 압박`으로 해석하며 잔뜩 긴장한 분위기다.
해묵은 해법이라도 효과가 있다면 `OK`다. 문제는 과연 정부의 인위적인 가격인하 정책이 `언발에 오줌누기`가 아닌, 효율적인 가격상승 억제책이냐는 것. 업계와 전문가들은 모두 `NO`라고 답하고 있다.
◇ "공급가 내려라 vs 유류세가 더 높다"..`해묵은 해법, 해묵은 논쟁`
물가가 오를 때마다 정부는 손볼 대상으로 유통과 통신, 정유업계를 지목한다. 식품업계는 이미 납작 엎드렸고, 불똥은 정유업계로 튀었다. 유가와 물가의 상관관계가 높은데다 소비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피부로 느끼는 항목 중 하나가 바로 기름값이기 때문. `단골 해법`에 `단골 논쟁`이 재점화된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휘발유 가격이 오르면 정유사들이 폭리를 취한다고 오해하는데 원유를 사다가 운반하고, 정제하고, 유통하는 등 원가와 제반 서비스 비용을 빼면 사실 얼마남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실제로 정유사들의 정유사업 부문 영업이익률은 1~2% 정도로 제조업체 평균 영업이익률을 밑돈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11%에 달했다.
이익을 포기하고 가격인하에 `올인` 한다고 해도 소비자들의 가격인하 체감은 미미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해 3분기까지 벌어들인 수익을 고스란히 휘발유 가격인하에 쏟아붓는다고 해도 실제 소비자가격을 리터(ℓ)당 10원도 내리기 어렵다는 계산이다.
이같은 사정을 감안할 때 휘발유 가격을 낮추려면 유류세부터 인하해야 한다는 것이 정유업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정부가 유류세와 원유보조금 등을 통해 휘발유 가격을 통제할 경우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분석이다.
실제 유가보조금을 지급해온 인도네시아의 경우 지난 2008년 국제유가가 치솟자 재정부담을 줄이기 위해 보조금을 축소했다가 휘발유 가격이 폭등해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중국도 국제유가 급등으로 유가보조금이 2007년 220억달러, 2008년 400억달러로 폭증해 재정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한 업계 전문가는 "원유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물가를 잡겠다고 국제적으로 비싼 기름값을 낮춰 공급하는 것이 맞는 정책이냐"며 "소비절약을 통해 사용량을 줄이도록 유도하는 것이 보다 건전한 정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정부의 인위적 가격통제..부작용은 없나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유사가 공급가격을 일시적으로나마 인하하는 등 정부 정책에 보조를 맞출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업계 전망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인위적 시장가격 조작이 효과가 있을까. 급한 불은 끈다고 해도 나중에 남게 될 부작용은 없을까.
시장논리상 휘발유 가격을 낮추게 되면 정유사들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동률을 낮출 공산이 크다. 공장을 가동할수록 손실이 커지기 때문에 가급적 생산을 줄이게 된다는 것. 가동률을 낮추면 국내 수급에 불균형이 발생하고, 결국 공급이 수요를 받쳐주지 못해 가격이 재상승하게 된다. 국제유가가 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인위적 가격인하 정책이 단기 효과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에는 이같은 메커니즘이 자리잡고 있다.
가격인하로 손실을 입게 된 정유사들은 설비와 연구개발(R&D)에 투자할 여력이 축소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투자를 줄이게 되고, 이는 MB 정부가 독려하는 설비투자 확대 정책과 녹색정책에 위배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수익이 줄어들게 되면 설비와 R&D 투자를 줄일 수 밖에 없다"면서 "신에너지 등 녹색사업과 해외 자원개발 사업 등에 대한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 정부, 유류세 인하는 안돼..기업이 총대 메라?
기름값 인하로 인한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 정부가 표방하는 친서민정책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업계 관계자는 "휘발유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상황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자가용을 몰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서민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유류세를 내릴 경우 휘발유 소비가 많은 부유층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서민층보다 상대적으로 크다는 `부자감세` 논란 이외에도 에너지 소비를 부추기고, 세수도 줄어들게 돼 정부는 유류세 인하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 입장을 보여왔다.
임종룡 재정부 차관은 14일 방송에 출연, "유류세를 낮추면 유가가 떨어지겠지만 세수 손실이 2조원 가량 발생하고 휘발유 가격도 그다지 낮아지지 않는다"면서 "유류세 인하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결국 가격인하를 위한 두 가지 툴(tool) 가운데 정부가 가진 수단(유류세)은 동원하기 어려우니 기업들이 가진 수단(공급가격 인하)을 끌어내려는 것이 현 정부의 정책 스탠스. `공정` 여부를 놓고 논란이 불거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 "과연 이번에는.." 변죽만 울리는 대책 되풀이되지 말아야
전문가들도 국제 원자재 시장 가격에 연동하는 국내 기름값의 무조건적인 억제 정책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윽박지르기식 정책을 펴기보다는 정확한 조사와 그에 따른 실질적인 해결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조언이다.
안순권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시장의 수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돼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리를 무시하면 안 된다"며 "공정위는 국제유가에 맞게 국내 기름값이 책정됐는지에 초점을 맞춰 공정하고 객관적인 잣대를 갖고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그동안 정유사와 주유소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담합과 불공정거래를 막아보겠다면서 혼합판매제, 공급가격 공개제 등 다양한 방안들을 도입했지만 국제원유 시장이 요동치면 국내 기름값은 어김없이 치솟았다. 이는 시장유통구조 손질만으로 기름값을 내리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업계 관계자는 "국제유가가 오를 때마다 소모적인 기름값 논쟁이 불거진다"면서 "정부가 이번에는 변죽만 울리는 정책이 아니라 보다 창의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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