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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이 흐른 지금도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관중 난동으로 꼽히는 ‘1990년 잠실 관중 난입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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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기는 야구팬들의 관심이 집중된 빅매치였다.
홈팀인 LG는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던 팀이었고, 해태는 전년도까지 한국시리즈를 4년 연속 제패한 당대 최강팀이었다.
자연스럽게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두 팀의 경기는 연일 수많은 관중을 모았다.
그해 두 팀의 마지막 맞대결이 열린 8월 26일, 잠실야구장 역시 경기 시작 수 시간 전부터 몰려든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공식 집계된 관중만 3만 100명에 달했다.
경기는 5회까지 팽팽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6회부터 LG가 연달아 점수를 내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기울었다.
어느덧 점수는 10대0. 사실상 해태의 완패가 눈앞으로 다가온 순간, 3루 쪽 해태 관중 한두 명이 펜스를 넘어 그라운드로 뛰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규모가 수십,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반대편에 있던 LG 관중 역시 운동장에 뛰어들었다. 양 팀의 관중 500여명이 뒤엉키면서 잠실야구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일부 관중들은 외야 광고판을 뜯어내고, 관중석 한쪽에서는 불을 지르는 이들까지 나타났다.
심지어 웃통을 벗은 한 관중이 그라운드에 쓰러져 있던 다른 관중을 향해 철제의자를 휘두르는 장면이 언론사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큰 충격을 안겼다.
구장 측은 흥분한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전광판에 태극기를 띄우고 애국가도 틀었으나, 이미 과열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장내 아나운서도 “우리는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라며 거듭 자제를 호소해 봤지만, 성난 관중들의 고함에 묻힐 뿐이었다.
경찰 투입되고 나서야 가까스로 진정…19명 구속, 11명 중형
사태는 전투경찰 3개 중대(400명 규모)가 출동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진정되기 시작했다.
관중 난입으로 중단된 경기는 1시간 7분여 만에 재개될 수 있었다.
최종 스코어는 13대 1. LG의 대승으로 끝이 났지만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었다.
당시 이미 십수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폭력에 가담한 일부 관중은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사건 발생 다음 날에는 대통령까지 나서 엄단을 지시하는 등 후폭풍이 거셌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페어플레이를 벌여야 할 경기장에서 난동을 부린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용납될 수 없다”며 “관련자를 가려 법에 따라 엄정 처리하라”고 주문했다.
경찰은 수사관 60명 규모의 특별 전담팀을 꾸려 관중 난입 사건에 대한 수사를 확대했다.
사건 당시 현장에서 연행된 6명에 이어 13명이 추가로 붙잡혀 구속 수사가 진행됐고, 재판에도 넘겨졌다.
같은 해 10월 법원은 주동자 격인 11명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경기장 집단 난동을 벌인 관중들에게 이러한 중형이 내려진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사건은 야구장 운영 방식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국은 야구장 내 질서를 유지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이듬해인 1991년부터 야구장 지정좌석제를 도입했다.
야구팬들에게도 당시의 응원 문화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응원은 치열하게 하면서도 경기장 안에서는 기본적인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했고, 36년 전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광란의 밤’은 오늘날 야구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 됐다.
당시 사건은 잠실야구장이 올해를 끝으로 철거된다는 소식과 맞물리면서 다시 회자하고 있다.
이번 시즌이 종료되면 잠실야구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잠실야구장을 대체할 구장은 3만석 규모의 국내 최대 돔 야구장으로, 오는 2032년 지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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