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양희동 기자] ‘오징어게임’은 2021년 시즌1을 시작으로 2024년 시즌2, 2025년 시즌3까지 이어지며 넷플릭스 역대 최고 흥행작으로 우리나라 대표 ‘K-콘텐츠’ 반열에 올랐다. 이 작품은 빚더미에 고통받던 참가자가 456억원의 상금을 놓고 목숨을 건 게임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배우 이정재가 연기한 주인공 ‘456번 성기훈’도 불법 채권추심을 견디다 못해 게임에 참여한다.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적인 흥행을 거둔 배경에는 빚을 진 고통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란 방증이다.
정부는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던 ‘장기 연체채권 채무조정 프로그램(배드뱅크)’를 통해 7년 이상, 5000만원 이하 장기 연채채권을 일괄 매입·소각할 예정이다. 오징어게임의 성기훈처럼 극단으로 내몰린 채무자들을 한꺼번에 구제하겠다는 취지다. 이에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산하에 채무조정기구를 오는 9월까지 설립하고 연내 장기 연체채권 매입을 추진할 계획이다. 금융위원회는 113만 4000명의 장기연체채권 16조 4000억원이 소각이나 채무 조정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문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이런 이벤트성 빚 탕감이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로 이어져, 신용 질서를 허물고 금융시장 건전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대출을 성실히 갚은 채무자와의 형평성, 배드뱅크 설립 등의 소요 재원 8000억원 중 절반인 4000억원이 국민 세금으로 충당하는 부분 등에서 우려가 나온다. 여기에 은행 등 금융권이 나머지 4000억원을 출연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팔 비틀기’란 비판도 제기된다.
금융당국은 이런 논란을 의식해 ‘파산’에 준하는 수준으로 상환능력을 상실한 연체자만 엄격하게 선별·지원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중위소득 60% 이하(4인 가구 기준 월 365만 8664원 이하)로 처분 재산이 없는 연체자가 대상이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20%로 1000만명 가량인 중위소득 60% 이하 국민 중 113만 4000명을 정확히 선별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연체자 중 상당수가 중위소득 32%이하인 기초생활수급자(약 260만명)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의 수급비는 법적으로 채권 추심을 할 수 없는 만큼 실제 빚 탕감 효과가 미미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기에 빚 탕감을 받은 자영업자는 이후 추가 대출을 통해 ‘좀비 가게’를 양산한다면 금융기관이 자영업 대출 문턱을 높여 우량 자영업자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금융위원회도 “채무자의 직업이나 종사 업종 등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인정한 바 있다. 기초생활수급자 여부도 빚 탕감 이후 사후적으로 확인할 예정이다. 결국 채무조정 과정에서 개인 간 형평성 문제나 선별 과정의 오류 등이 발생할 수 있다. 금융시장의 최대 리스크는 불확실성이다. 오징어게임 시즌3에서 게임 주최 측인 프론트맨(이병헌 분)은 성기훈에게 “아직도 사람을 믿나”라고 묻는다. 자본주의에서 신용은 사람 개개인에 대한 믿음이 아닌 ‘빚은 갚는다’는 원칙 속에서 유지된다. 정부는 이번 배드뱅크 설립을 계기로 빚 탕감의 명확한 원칙과 법적 기준을 세워, 사람(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