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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1914년 경성. 청계천 물길 가까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은 한백유였다. 그러나 그는 침묵을 뜻하는 ‘묵’(默) 자를 따라 자신의 이름을 ‘한묵’(1914∼2016)이라 바꾸었다. 실제로 그는 그 이름처럼 말보다는 그림으로, 소리보다는 색과 선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살아갔다.
한묵의 예술적 기질은 유년시절 마주한 풍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는 청계천 인근에서 지전을 운영했다. 가게에는 화선지, 족자, 병풍 같은 전통적인 물품뿐 아니라 당시로선 드물게 일본 미술잡지도 함께 놓여 있었다. 손님이 뜸한 한낮의 적막한 시간, 어린 한묵은 그 잡지를 하나씩 펼쳐들고 그림들을 바라봤다. 그 경험은 어린 한묵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고, 그는 자연스럽게 미술이라는 세계에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미술에 매료돼 가던 한묵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북만주로 향했다. 펑톈(奉天·지금의 선양), 하얼빈, 다롄을 돌며 일본인 화가들과 교류했고, 현지 전람회에 자신의 그림을 출품하며 조선 안에서는 경험할 수 없던 시야와 감각을 익혔다. 한껏 시선을 확장한 그는 곧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가와바타미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배웠다. 유화물감의 냄새, 광택 있는 캔버스의 질감, 원근법과 해부학, 색이 가진 상징성까지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지만 그는 그 언어를 빠르게 흡수해나갔다.
종군화가로 한국전쟁 참상 화폭에 담기도
1944년 전쟁의 그림자가 아시아 전역을 덮치자 한묵은 조선으로 귀국했다. 형이 장로로 있던 금강산 자락의 온정리교회에 머물며 조용히 그림을 그리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상황이 악화하자 1·4후퇴 당시 홀로 남하했고, 부산까지 내려갔다. 생사를 넘나드는 피란길에 그간 그려온 그림 대부분은 가져올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른 시기의 한묵 작품은 지금까지도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그 피란지에서도 그는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전쟁의 참상을 화폭에 담았다.
1950년대 한묵의 작품세계는 폭이 넓고 다채롭다. 비교적 얌전한 풍경화부터 강렬한 붓질이 돋보이는 정물화, 고도로 단순화한 인물화까지 장르와 표현방식 모두에서 다양한 실험을 이어갔다. 야수파, 입체파, 추상파 등 서구 현대미술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기만의 시선을 구축해나갔다. 화가가 자신의 양식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다년간의 시행착오와 탐색이 필요한데, 한묵에게는 1950년대가 바로 그런 시기였다. 그림 하나하나를 통해 끊임없이 방향을 모색했고 선과 색, 화면의 구성을 바꿔가며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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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1961년, 마흔여덟의 한묵은 돌연 파리행을 결심한다. 한국에서는 평론가이자 교수(홍익대)로, 또 화가로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세상은 그 안정을 잡으라고 했지만 그는 이 모두를 뒤로하고 낯선 땅을 선택했다. 불어에도 익숙하지 않았고 누군가 초청해 기다리는 상황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미지였고 어쩌면 무모했다.
파리에 도착한 한묵은 1년간 붓을 들지 않았다. 대신 미술관과 갤러리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시대의 흐름을 관찰했고, 거리의 책방을 서성이며 프랑스어를 익혔으며, 청소부나 식당 종업원, 페인트공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전에 몸에 익은 그림의 습관을 모두 지우기 위한 공백의 시간이자 자신을 완전히 비우기 위한 고요한 해체의 과정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비운 끝에 탄생한 것이 ‘「T」구성’(1963)과 같은 완전한 추상이다. 서울시절의 다소 표현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색·선·면 등 기본적인 시각 요소들의 배열에 몰두한 결과물이었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다시 순수한 기하추상에 주목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한묵은 그 기류를 민감하게 포착해 이러한 화면을 만들어냈다. 본격적인 한묵의 추상회화가 시작한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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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90년. 파리에 도착한 지 30년 만에 한묵은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 찾아온 이 전시에 파리 미술계는 놀라움과 찬사를 보냈다. ‘나이를 잊은 에너지’ ‘시간을 넘은 언어’ 등의 평가가 뒤따랐다.
만주, 도쿄, 부산, 파리…엉겅퀴처럼 흩날리며 걸작 피워낸 화가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묵의 후기 회화는 1950년대 그가 한국에서 치열하게 길을 모색하던 시기의 그림과 꽤나 닮아 있다. 이를테면 앞서 봤던 작품 ‘엉겅퀴’에서도 뾰족하고 강렬한 선의 구조와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화면 구성이 눈에 띈다. 이는 이전에 이미 다진 실험의 바탕 위에 파리에서 새롭게 만난 옵아트(Op Art) 같은 ‘움직이는 회화’와 결합하면서 후기 회화의 뚜렷한 스타일을 만들어냈음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그의 인생 후반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영감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른 시절부터 천천히 끈질기게 쌓아온 실험의 연장선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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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대로 씨앗을 날리며 거친 들판 같은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한묵.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았지만 결국 그는 자기만의 꽃을 피워냈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그렇게 그의 이름은 그의 작품과 함께 한국 미술사의 한자리에 깊이 새겨졌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