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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나는 먹고살기 위해 호랑이를 쫓아 연해주를 떠돌았지만 너는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가거라.” 사냥꾼 할아버지의 유언은 손자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고 화가가 된 그는 평생 조선을 그리워하며 민족의 기억을 화폭에 새기면서 살아갔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가려 그 이름과 그림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잊혀졌다. 변월룡(1916∼1990). 이제 천천히 그가 남긴 유산을 되짚어보자.
변월룡은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났다. 시베리아 동남단에 위치한 연해주는 19세기 중반 이래로 조선인이 꾸준히 이주해 온 곳이다. 변월룡의 조부가 정확히 언제 이곳에 정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많은 이들이 그랬듯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힘겹게 삶의 터전을 일궜을 거다. 일제강점기의 연해주,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 민족해방운동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고려인 학교와 교회, 한글 신문사, 극장, 라디오 방송국 등이 들어섰고 변월룡은 이곳 고려인 학교에서 열 살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실시한 소수민족 동화정책은 고려인들에게 가혹했다. 힘써 일군 삶의 터전을 뒤로한 채 중앙아시아 벌판으로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다. 그나마 변월룡만은 예외였는데, 우랄산맥 인근의 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강제이주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이웃들이 “썩히기 아깝다”며 미술학교에 보내준 덕분이었다.
이후 변월룡은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그중에서도 최고의 학교인 ‘일리야 레핀 레닌그라드 회화·조각·건축아카데미’(이후 레핀미술대학)에서 본격적인 미술교육을 받았고 졸업 후에는 이곳에서 강사로, 나아가 교수로 평생을 보냈다. 미술가동맹 회원으로 개인 화실을 배정받았고, 재단이 요청한 주문을 수행하며 국가 주도 전시에 꾸준히 참여했다.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출근 때 전용 택시가 늘 대기할 정도로 예우받는 인물이 됐다. 1960년대부터는 핀란드,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당시 엄격히 제한했던 유럽 여행을 자주 다닐 수 있었다는 점은 변월룡이 소련 체제 내에서 얼마나 신뢰받는 인물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변월룡은 소련 공동체의 내부에 속한 소수자, 다시 말해 이례적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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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이 익힌 미술은 소련식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소련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되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사실적인 방식으로 그리는 그림이었다. 국가가 교육과 예술창작을 강력히 통제하던 이 시기, 변월룡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정치 포스터를 여러 종류 제작했고, 새로운 조국 건설의 주역인 노동자를 이상적으로 그려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하지만 동시에 변월룡은 조선과 관련된 사건들, 이를테면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일본군과 싸우는 소련군의 모습이나 해방된 북한 주민들이 소련군에 감사를 전하는 장면 등을 여러 차례 그렸다. 그의 그림 속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러한 그의 정체성은 북한에 방문교수로 머물던 시기에 더욱 또렷해진 듯하다. 1953년 7월 서른일곱 살이던 변월룡은 소련 문화성의 명령에 따라 북한에 파견됐다. 전쟁 직후 북한은 사회 전반에 걸쳐 소련을 본보기로 삼으려 했고, 이에 따라 미술 분야에서도 양국 간 교류가 활발했다. 변월룡의 파견은 그런 흐름 속에서 약 15개월간 진행됐다. 특히 그에게는 러시아 예술아카데미를 모델로 삼아 평양미술대학을 재건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전파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한국어로 유창히 소통할 수 있었던 변월룡은 소련 미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북한 미술계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평양미술대학 교수들은 진심 어린 존경을 담아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북한에 머무는 동안 변월룡은 애정을 가득 담아 그곳 마을 주민과 풍경을 화폭에 옮겼다. 그는 작은 휴대용 캔버스와 스케치북을 늘 곁에 두고 연필과 물감을 사용해 인자한 노인, 수줍은 소녀, 모내기하는 농민들, 대동강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이들은 ‘새 조국의 노동자’가 아니라 고유한 표정과 존재감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평양의 대동문, 압록강, 모란봉 등지의 풍경도 부지런히 그렸다. 온도와 습도까지 담긴 것 같은 그의 풍경화는 관람자 눈앞에 닿을 듯이 생생하다. 그 가운데 ‘어느 흐린 날의 금강산’(1953)은 북한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린 것으로 보이는 폭 50㎝ 남짓한 작은 그림이지만, 변월룡은 따뜻한 색조와 경쾌한 붓질을 통해 그 풍경을 바라보는 자신의 애정어린 시선과 들뜬 마음을 꽉 채워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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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분단의 비극’(1962)은 소련에서 제작한 변월룡의 대표적인 판화로, 철조망을 사이에 둔 이산가족의 절절한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아이를 업은 아내는 눈물을 흘리고, 포로가 된 남편은 멀리서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변월룡이 존경했던 렘브란트의 판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인물의 감정과 순간의 비극을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조선 분단의 비극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의 그림 앞에서는 그 익숙한 진실이 새삼 가슴에 사무친다. 이것이 바로 변월룡의 그림이 지닌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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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은 이렇게 북한을 계속해서 생각하며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그것은 끝내 불가능했다. 1956년 무렵 북한에서 소련파가 숙청되며 양국 간의 관계는 얼어붙었고 그 여파로 소련 예술가들의 파견도 중단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변월룡은 북한 당국의 숙청 대상에 오르며 그곳 미술계 인사들과의 교류마저 끊기고 말았다.
그럼에도 생의 말년에 그린 작품들(금강산의 소나무, 북한의 풍경, 40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 땅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북한에서 부지런히 눈으로 담고 스케치북에 옮겨뒀던 드로잉들은 수십 년이 지나서도 그의 창작의 밑바탕이 됐다.
1990년 5월 한·러 수교가 체결되기 불과 넉 달 전 변월룡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영면에 들었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한글이름을 새겨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족은 이를 지켰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지 않았다.
변월룡은 타국의 체제 아래서도 결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고, 이를 캔버스 위에 고요하게 그러나 강인하게 새겨 넣었다. 그의 그림은 억압과 침묵의 시대를 살았던 고려인의 목소리이자 경계를 넘어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한 예술가의 몸부림이었다.
정작 ‘조국’이라 부르는 곳에 사는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하다. 오히려 ‘뿌리’나 ‘정체성’ 같은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런 우리에게 변월룡의 그림은 묻는다. 당신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가질 수 없었기에 더욱 치열하게 붙들었던 디아스포라 변월룡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이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