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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상 이 작품]연극의 본질 일깨운 '침묵'이란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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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기자I 2025.06.24 06:00:00

[제12회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리뷰]연극부문
서울연극제 해외교류작 ''S고원에서''
제한적 공간인 요양원서 삶·죽음 조명
강제적 단절 겪은 현대인의 삶 떠올라

[이시원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의 ‘S고원에서’는 1991년 초연 이래 꾸준히 사랑받으며 세계 여러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온 작품이다. 이달 초에는 2025년 서울연극제 해외교류작품으로 다시 서울 무대에 올랐다. 왜 지금 다시 이 작품일까?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극작가로서 다시금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연극 ‘S고원에서’ 공연 사진. (사진=서울연극협회)
이 연극은 극적인 사건이나 강렬한 갈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폭의 수묵화처럼 관객의 마음을 은근하게 사로잡는다. 무대 위에 흐르는 정적과 침묵은 공백이 되어, 관객 각자가 가진 경험과 감정을 조용히 스며든다. 히라타 오리자는 한 인터뷰에서 “현대인은 과잉된 자극과 정보로 피로를 느끼고 있다”면서 “자극이 차단된 공간에서 스스로를 대면하게 하는 것이 연극의 본질”이라 말했다. ‘S고원에서’는 이런 그의 연극 철학을 정확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려한 서사보다는 인간 내면의 미세한 풍경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 집중하는 연극이다. 요양원이라는 제한적이고 고요한 공간을 배경으로 삶과 죽음, 그리고 일상의 작은 흔들림을 절제된 언어로 보여준다. 특히 고립된 공간인 요양원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강제적 단절을 겪은 현대인의 삶이 떠오른다. 병원과 극장이 문을 닫고 가까운 사람과의 만남조차 어려웠던 현실을 겪었던 탓에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면, 그걸 이렇게 가만히 보는 거야”라는 대사가 깊은 공감과 아픔으로 다가왔다.

극중 “당신 그림 중에도 아무 풍경이 없는 그림 많잖아”라는 대사는 이 작품이 전하려는 핵심을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목적을 잃고 고립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내면 풍경을, 삶의 허전함과 방향성 없는 일상을, 이렇게 날카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정지된 듯한 순간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말임에 분명하다.

연극 ‘S고원에서’ 공연 사진. (사진=서울연극협회)
‘S고원에서’는 관습적인 연극의 구조를 벗어나 관객에게 능동적 참여를 요구한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무대 위의 침묵과 정적은 연극적 사건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관객 스스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극적 사건의 빈자리는 관객의 상상력과 경험으로 채워진다. 이를 통해 관객은 작품과 깊은 내적 대화를 나누고,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평범한 순간과 사소한 대화 속에 숨어있는 삶의 진실을 발견하게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평온한 응시와 깊은 사색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젊은 시절 이 작품을 접했을 때보다 지금 더 깊은 울림과 공감을 느낀다. 젊었을 때는 작품의 섬세한 침묵과 고요함이 신선하고 독특하게 다가왔다면, 코로나19 대유행을 겪고 난 지금은 이 정적이 오히려 더욱 강력한 언어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빈 객석 앞에서 공연을 하고, 온라인으로 관객을 만나는 과정을 거치며 연극이 결국 숨소리와 작은 떨림 하나까지 관객과 공유할 때 완성되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S고원에서’는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중대한 전환점을 거친 우리 사회를 재조명하는 거울과 같은 작품이다. 강렬한 자극과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내면의 고요와 침묵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이 지금 다시 무대에 오른 이유가 아닐까.

이시원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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