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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파격적인 감세 정책에서 비롯한 재정적자 우려가 달러 약세를 불러온 한 축이다, 여기에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인 스티브 미란이 쓴 글, 소위 ‘미란 보고서’로 불리는 ‘세계 무역체제 재구축을 위한 지침’에 나와 있는 바처럼 미국이 직면해 있는 무역수지 적자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관세뿐만 아니라 약달러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달러 약세를 이끌고 있는 또 다른 축이다.
달러가 약해지면 비달러 자산에 대한 선호가 강해진다. 글로벌 투자자 입장에서 약해지고 있는 통화로 표시된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면 환에서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미국 자산의 독주가 일단락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이유도 여기 있다. 미국 증시도 최근 강하게 반등하고 있지만 한국을 비롯한 비달러 증시의 반등세가 훨씬 가파르다. 2025년 1분기 말 이후 지난 7일까지 한국 코스피는 23.3%나 급등했지만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의 상승률은 11.0%에 그치고 있다. 환율 변화까지 고려할 경우 양국 증시의 수익률 격차는 더 벌어진다. S&P500 지수에 투자한 한국 서학개미의 경우 원·달러 환율 하락세를 고려하면 1분기 말 이후의 실질 수익률은 3.9%로 낮아진다.
역사적으로 달러 약세는 미국 이외 지역 증시에 큰 기회로 작용하곤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진 국제 통화질서인 브레튼우즈 체제는 사실상 고정환율제였고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달러의 금태환 중단을 발표하면서 변동환율제로의 길을 열었던 1971년 이후 미국 달러화가 기조적으로 약세를 나타냈던 시기는 모두 세 차례 있었다. 달러 인덱스 기준 달러 가치가 31.1% 하락했던 1971년 7월~1978년 10월이 1차 달러 약세 국면, 52.4% 하락했던 1985년 2월~1992년 8월이 2차 달러 약세 국면, 41% 하락했던 2001년 7월~2008년 4월이 3차 약세 국면이었다.
기자 Pick
1차 달러 약세 국면은 대부분 닉슨과 제럴드 포드 등 공화당 당적의 대통령 집권기에 걸쳐 나타났다. 이때도 재정적자 문제가 심각했는데 정부의 과도한 지출이 문제였다. 1930년대 대공황 국면 이후 자본주의의 주류 모델이었던 케인스 경제학의 영향력이 이어지면서 경제 운용에 정부의 역할이 강조돼 재정지출이 높은 수준에서 유지됐다. 여기에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지면서 군사비 지출도 급증했다. 미국의 무역수지도 1960년대 중반부터 적자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닉슨 행정부의 달러의 금태환 중단 조치는 늘어나는 무역수지 적자로 대미무역수지 흑자국들에 지불해야 할 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군사작전 하듯이 전격적으로 이뤄진 금태환 중단 선언은 달러 약세를 미국의 교역국들에 강요한 폭력적인 조치와 다름 없었다.
2차 달러 약세기는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집권기에 나타났다. 역시 모두 공화당 소속의 대통령이다. 이때도 재정수지 적자가 문제였는데 레이건 대통령이 행한 대규모 감세와 냉전의 막바지 소련과의 군비 경쟁에 따른 군사비 지출 확대가 주된 원인이었다. 이때는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글로벌 공조 차원에서의 달러 약세가 나타나기도 했다.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 이후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컸던 일본 엔화와 서독 마르크화의 인위적 절상(달러 약세)이 나타났다.
3차 달러 약세 국면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임기에 나타났다. 공화당 소속이었고 대규모 감세와 9.11테러 직후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침공에 따른 군사비 지출 확대로 재정적자가 커졌다. 연준의 공격적인 금리 인하에 따른 소비 확대와 부동산 붐으로 무역수지 적자는 크게 늘었지만 1·2차 달러 약세 국면과는 달리 인위적으로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정책은 시행하지 않았다.
현재 상황은 과거 세 차례의 달러 약세기와 매우 유사하다. 트럼프 행정부가 재정지출 축소 없는 감세를 추진하고 있고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전쟁에 개입하고 있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미란 보고서는 달러 가치 약세를 유도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과거 달러의 추세적 약세가 나타났던 세 차례 시기가 모두 한국 증시가 기록한 세 차례 장기 강세장과 겹쳐 나타났다는 점이다. 1972~1978년(코스피 연평균 상승률 +28.9%), 1985~1988년(+58.8%), 2004~2007년(+23.6%)은 모두 추세적 달러 약세 국면 안에 포함된 시기였다. 물론 1970년대의 강세장은 중동 건설붐, 1980년대 후반의 강세장은 3저 호황, 2000년대 초반의 강세장은 중국 특수 등이 뒷받침됐다는 점과 비교하면 최근 강세장은 실물경제의 활력이 크게 떨어져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다만 유동성의 관점에서 달러 약세가 미국 이외 지역 자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은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미국이라는 블랙홀로 글로벌 유동성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외 시장으로 유동성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자산가격은 펀더멘털과 유동성의 함수인데, 약달러는 미국 외 자산에 긍정적인 유동성 효과를 일으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