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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인사이드]'야간금고'를 아시나요

전재욱 기자I 2017.12.03 11:04:47

[야간금고의 흥망성쇠]
비대면 거래 '원조'…야간·휴일에 예금 처리
IBK기업·KB국민·KEB하나銀 등 세 곳 운영
80년대 저축장려목적…370여 개까지 설치
ATM밀려 '퇴물 신세' 2000년 중반 자취 감춰

KEB하나은행(왼쪽)과 기업은행이 서울 을지로 은행 본점에 설치해서 운영하는 야간금고.[사진=전재욱 기자]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A은행 김 대리는 월요일 출근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일요일 사이에 야간금고에 들어온 고객의 돈을 회수해 입금하는 것이다. 예금 봉투 하나가 야간금고에 들어와 있다. 매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야간금고를 찾는 단골 고객이 두고 간 것이다. 김 대리는 봉투에서 입금액을 확인한 후 고객 통장에 입금처리한다.

1980년대 후반 한 시중은행 야간금고의 풍경이다. 지금은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 밀려 이름마저 생소해진 야간금고지만 저녁 장사를 하는 상인이나 자영업자들이 하루 장사를 끝내고 꼭 들르는 곳이었다. 이튿날 출근한 은행원들은 아침부터 밤새 야간금고에 모인 돈을 처리하느라 바빴던 시절이 있었다. 아날로그 방식의 ‘원조 비대면 거래’가 바로 야간금고다. 빠르게 이뤄진 금융권의 디지털화와 자동화기기 출연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지만 여전히 야간금고를 이용하는 소수의 고객 덕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은행 세 곳만 운용 ‘명맥’ 유지

주요 시중은행 가운데 야간금고를 운영하는 곳은 기업은행과 KB국민은행, KEB하나은행 등 세 곳이다. 이들은 영업점 건물 벽 한쪽을 터서 야간금고를 운영하고 있다.

야간금고가 가장 많은 곳은 기업은행이다. 서울 중구 을지로 본점을 포함해서 전국 10곳에 야간금고를 설치했다. 국민은행은 서울 서대문구와 용산구, 도봉구 영업점 3곳을 운영 중이다. KEB하나은행 야간금고는 을지로 본점에 유일하게 하나 있다.

야간금고는 이용 전 은행에 먼저 신청해야 한다. 수수료 등 비용은 없다. 은행에서 제공한 봉투에 예금을 넣고 ‘야간금고입금의뢰서’에 액수를 적은 후 금고문을 연 후 보관하면 끝이다. 가장 가까운 영업일 기준으로 입금해준다.

야간금고는 ATM기의 원형이지만 성격은 좀 다르다. ATM기는 365일 24시간 은행에서 유지하는 무인점포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입금과 송금, 인출에 신용카드 업무 등 웬만한 지점 업무를 ATM에서 할 수 있다. 야간금고는 고객이 입금을 목적으로 현금을 예치하면 직원이 일일이 처리해야한다.

KEB하나은행의 야간금고 입금 의뢰서[자료=KEB하나은행]
◇저축장려 목적…한때 전국 370개 운영

야간금고가 본격적으로 도입한 때는 37년 전이다. 1980년 은행감독원(현 금융감독원)은 은행영업시간 후 예금이 가능한 무인 야간금고를 설치하도록 시중은행에 업무지침을 내려보냈다.

밤새워 일하는 상인들을 배려한 것이다. 은행 영업점이 열리기 전에 뭉칫돈을 도난당하는 사고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이면에는 산업화 시절 정부의 의도도 숨겨져 있다. 은행 이용이 편리해지면 예금이 늘고 기업금융에 숨통이 트이리라는 기대감이 작용했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뤄지던 시기였지만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가 낮은데다 이용 문턱이 높아 은행이용률은 지금보다 저조했다.

이후 야간금고는 서울 남대문시장 등 대규모 시장이 형성된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야간금고 이용객이 붐벼 은행 일이 많아진 탓에 행원들이 야근하기 일쑤였다. 야간금고의 편리성이 입소문을 타고 확산하면서 금고 수가 전국 340여 개에 이르기도 했다. 야간금고는 명절에 고객의 귀중품을 맡는 현재의 ‘대여금고’역할도 했다.

◇ATM에 밀려 ‘퇴물’ 취급…“그래도 운영한다”

1990년7월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이 명동지점에 국내 은행으로는 처음으로 ‘무인자동화코너’를 설치하면서 ATM 보급이 본격화 됐다. ATM의 확대는 야간금고의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2000년대 중반 시중은행 야간금고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이제는 은행원조차 야간금고 쓰임을 많이 알지 못한다. 최근입행한 은행원은 “야간금고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그나마 남은 야간금고의 이용률도 극히 낮다. KEB하나은행 야간금고 이용객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기업은행 야간금고 10개 중 3개는 고객 이용이 아예 없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전산이 아니라 수기로 하는 거래라 실시간 이용건수를 파악하기 어렵다”며 “하지만 개인고객은 거의 없고 1주일 동안 이용 고객이 없을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주 이용객은 아직 통장거래를 고수하는 기업이나 휴일에 기부금을 받은 종교단체 정도다. 아날로그 비대면 거래의 시초인 야간금고는 디지털 비대면 시대에 접어들면서 퇴물로 전락했다.

이를 없애면 은행으로서는 영업점 공간 활용도가 커지고 직원의 수고도 덜어준다. 그런데도 야간금고를 운영하는 은행은 몇 안 되는 고객을 위해서라도 야간금고를 폐쇄하는 방안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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