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결정적 증인' 러시아 청년 사바틴을 만나다

by김은비 기자
2020.10.19 17:40:57

'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
을미사변 당일엔 경복궁서 당직
증언서에 당시 상황 상세히 기록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무리에 밀려 왕후와 조선의 궁녀들이 거처하고 있는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일본인들은 고함치고 소리를 지르며 조선 여자들을 질질 끌어내어 창문 밖으로 내던졌습니다.…제 옷깃을 잡고 당기던 일본인은 상당히 명확한 영어로 저에게 “왕후는 어디 있는가? 왕후를 지목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왕후의 얼굴을 본 적이 없고 유럽인으로서 남자로서 조선 왕후가 머무는 장소를 알 수 있는 권리나 가능성이 없다고 설득했습니다.”

을미사변을 목격한 러시아인 사바틴이 남긴 사건 당일의 기록이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당시 조선 주재 일본공사였던 미우라 고로를 필두로 한성 주둔 일본군 수비대와 공사 관원, 낭인 집단 등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사바틴이 남긴 10페이지 가량의 구체적 기록 덕에 일본이 을미사변의 배후임이 드러날 수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사바틴의 증언서(사진=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문화재청은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오는 19일부터 오는 11월 11일까지 덕수궁 중명전에서 ‘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를 개최한다. 전시는 사바틴이 1883년 조선에 입국해서 1904년 러시아로 돌아가기까지 기록등을 통해 그의 기록을 전한다. 특히 을미사변 목격자로 널리 알려진 그가 사실 조선 근대 건축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전문가라는 사실에 집중한다. 19일 열린 기자간담회를 통해 전시장을 찾았다.

전시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총 3개의 주제로 나눠 진행된다. 전시의 서막에서는 을미사변 현장을 영상으로 재현했다. 이정수 학예연구사는 “사바틴이 목격한 을미사변의 느낌을 내기 위해 입구를 어둡게 했다”며 “사바틴이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친 인물인지 소개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사바틴이 진술서에서 그린 경복궁 내 명성황후 시해 장소와 약도, 일본군의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등 뼈아픈 역사를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바틴이 그린 경복궁 내 시해장소 지도(사진=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1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사바틴의 활동을 볼 수 있다. 전시 총괄을 맡은 김영수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교수는 “사바틴은 14살에 삼촌을 따라 해양전문학교와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고 1890년 초반 중국 상하이에 머무르다 한국에 들어왔다”고 소개했다. 당시 사람들이 낯선 러시아인의 이름을 ‘설덕’, ‘살파정’, ‘살파진’ 등으로 불렀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2부 ‘러시아 공사관, 사바틴의 손길이 닿다’에서는 러시아 공사관 건립에 관여한 사바틴을 소개한다. 사바틴은 당시 러시아 공사 겸 총영사직을 맡았던 베베르를 도와 공사관 도면과 예산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베베르는 당시 사바틴을 “원래 직업이 건축가는 아니지만 건축에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고, 더 없이 성실히 이번 작업에 임할 사람이라고 확신한다”고 소개했다.

러시아 공사관의 최초 설계안과 준공안의 비교, 당시 기축통화였던 멕시코 달러로 계산된 견적서 등을 공사관 건립과 관련된 우여곡절을 엿볼 수 있다.

러시아 공사관 본관과 정문 전경(사진=국립고궁박물관)
3부 ‘사바틴, 제물포와 한성을 거닐다’에서는 제물포와 한성에 위치한 12개 건물의 모형과 사진들을 전시했다. 모든 건물에 사바틴이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학예사는 “사바틴이 관여한 것이 확실한 건물은 관문각과 러시아공사관이다”며 “나머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의 건축양식 등을 바탕으로 사바틴이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인 사바틴에 대한 여러 연구가 있었지만 미흡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연구를 더 확장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안드레이 굴릭 주한러시아대사도 “유익한 전시를 통해 한국과 러시아 국민이 서로를 더 잘 알고 우정도 한층 깊어질거라 생각한다”며 전시장을 둘러봤다.

‘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 전시를 둘러보는 안드레이 굴릭 주한러시아대사(사진=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