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리더십 위기…獨·英·佛 '3각 기둥' 흔들

by방성훈 기자
2018.12.13 17:01:26

작아지는 메르켈·메이·마크롱…유럽 정치 불확실성 확대
英메이, 브렉시트 합의 실패 ‘책임론’…불신임 투표까지
유류세 올려 ‘부자 대통령’ 된 佛마크롱…노란조끼 운동 촉발
反난민 정서·포퓰리즘…獨메르켈 정계 은퇴 이끌어내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사진=AFP PHOTO)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유럽이 흔들리고 있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리더십이 도전을 받고 있어서다. 각자 다른 이유지만 하나같이 자국민들을 제대로 끌어안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실상 유럽을 이끌어 온 3개국, 정치적·경제적으로 유럽을 떠받치고 있는 ‘3개의 기둥’이어서 유럽 전체에 끼치는 파장도 적지 않다.

영국 집권 보수당 하원의원 317명은 12일(현지시간) 오후 메이 총리를 당 대표로 신임할 수 있는지를 묻는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찬성 200표, 반대 117표. 83표차로 승리한 메이 총리는 최소 내년 12월까지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메이 총리 입장에선 브렉시트 합의안 의회 비준 표결이 연기되고, 불신임 투표가 개최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정치적 타격이다. 그런데 반대표가 100명을 넘어 충격을 키웠다. 그간 보수당을 이끌고 2022년 총선에 도전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혀 온 메이 총리는 이날 선거 전에 물러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메이 총리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가 주도해 유럽연합(EU)과 맺은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합의다. 브렉시트 이후에도 EU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소프트 브렉시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브렉시트의 지지파와 반대파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특히 새 무역협정을 맺기 전까지 탈퇴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2020년 말까지 관세동맹에 잔류하는 ‘전환기’를 두는 것에 대한 반발이 가장 컸다. 전환기인 2019년 3월 30일부터 2020년 12월까지 EU의 제도와 규정을 적용받지만 의사결정 과정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하드 보더(국경 통과 시 통행 및 통관 절차를 엄격히 하는 것)’를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안전장치(Backstop)’라는 게 메이 총리의 설명이다.

문제는 관세동맹 잔류시 북아일랜드만 단일 시장에 남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또 안전장치가 일단 가동되면 영국이 일방적으로 협정을 종료할 수 없어 EU 관세동맹에 계속 잔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상황에서 브렉시트 충격을 최소화하려면 합의안을 일부 수정해 의회 승인을 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 메이 총리는 13~1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EU와 정상회담에 참석, 합의안 수정을 위해 EU 정상 설득에 나선다. 그러나 EU는 기존 합의안에 대해 “재협상은 없다”고 못 박은 상황이다. 이에 따라 EU와 영국이 합의 없이 결별하는 ‘노딜(no deal)’ 브렉시트가 현실화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브렉시트 합의안 수정이 가능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수정하더라도 보수당 내 브렉시트 강경론자는 물론 노동당 등 야당까지 충족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브렉시트 강경 지지파는 ‘하드 브렉시트’를, EU 잔류파는 제2 국민투표 실시를 요구하고 조기총선 가능성까지 나오고 있는 만큼, 향후 의회 승인까지 큰 난관이 예상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사진=AFP PHOTO)
프랑스에서도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 움직임이 일고 있다.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 급진 좌파 정당인 ‘라 프랑스 앵수미즈(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등 중도 좌파 대표들은 이날 마크롱 정부에 대한 불신임 안건을 상정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소속된 레퓌블리크 앙마르슈 정당이 하원 577석 가운데 과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만큼 의회 통과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민 불신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여서 불신임 안건 상정 자체만으로도 적지 않은 타격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이어진 ‘노란조끼’ 운동이 의회까지 움직였다. 프랑스인들은 지난달 17일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노란조끼를 입고 거리로 나섰다. 그리곤 ‘마크롱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1968년 5월 ‘파리 학생 폭동’ 이후 50년 만의 최대 규모 저항 운동으로 평가된다. 부자들과 기업들의 세금을 줄여주면서 유류세를 인상한 것이 원인이 됐다. 프랑스 경제를 장기 침체의 늪으로 빠뜨린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시켜놓고 보니 똑같더라’라는 인식이 서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취임 초기만 해도 나폴레옹 이후 가장 젊은 지도자로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마크롱 매직’을 외치던 프랑스 국민들은 이제 ‘부자들을 위한 대통령’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주말마다 열린 네 차례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70만명을 넘었다.

마크롱 대통령이 한 발 물러서 유류세 인상 계획을 전면 철회하고 최저임금 인상, 서민층 면세 확대 등 당근을 제시했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부유세 폐지 등 다른 정책들까지 문제삼으면서 여전히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그가 추진 중인 모든 정책들이 사실상 동력을 잃은 상태다.

한편 마크롱 리더십 위기로 프랑스가 이탈리아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노란조끼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마크롱 대통령이 받아들인 요구사항이 이탈리아의 재정적자 우려를 키운 정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다. CNBC는 “더이상 이탈리아만이 유럽의 문제아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사진=AFP PHOTO)
지난 7일 메르켈 총리는 2000년 4월부터 맡았던 기독민주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후임자로는 ‘미니 메르켈’로 불리는 아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워 당 사무총장이 낙점됐다. 2021년까지 총리직을 유지하게 됐지만 국정 장악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 자리를 8년째 지키고 있을 만큼 그의 영향력은 막대하다. 작년 9월까지만 해도 4연임에 성공한 독일 최초 여성 지도자에 오르며 장밋빛 전망이 기대됐다.

하지만 연정 구성에 난항을 겪은데 이어 올해 10월 지방선거에서 참패, 리더십 위기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텃밭인 독일 바이에른주와 헤센주에서 연이어 패배하는 등 1950년 이후 68년 만의 최악의 성적표였다. 메르켈 총리는 선거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2021년 임기를 끝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메르켈 총리에게 ‘난민들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붙여 준 결단이 그를 끌어내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 메르켈 총리는 2015년 2월부터 2년 동안 난민 100만명을 받아들이는 난민 포용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후 테러 등 독일 내 난민 범죄가 늘어나고 난민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포퓰리즘에 편승한 반(反)난민 정서가 유럽 전역을 덮쳤다.

다양한 해결책을 내놨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국경 강화, 난민 송환을 위한 수용시설 건설 등 강경책을 대거 수용하면서 메르켈 총리의 난민 정책도 크게 후퇴됐다. 그만큼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는 의미기도 하다.

메르켈 총리는 당초 약속대로 지난 7일 당 대표직 선출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메르켈 총리의 장기 집권도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