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백신이면 어쩌나"…2주 후 독감 예방접종, 믿어도 될까

by함정선 기자
2020.09.24 11:00:00

종이상자 담긴 백신 10분에서 1시간 상온 방치
WHO 안전기준 적용해도 문제 없다지만
백신 내 단백질 함량 변해 효능 없는 '물백신'될 가능성도
샘플링으로 품질조사…이상 없다 결론나도 불안 국민몫

[이데일리 함정선 기자] 인플루엔자(독감) 무료 예방접종에 쓰일 백신이 유통 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되는 사고가 발생하며 접종을 앞둔 국민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질병관리청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문제가 된 백신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후 품질에 이상이 없을 경우 해당 백신을 다시 무료 접종에 쓸 예정인데, 혹시나 나와 내 가족이 맞는 백신이 제대로 효능을 내지 못하거나 부작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당국이 상온 노출 사고를 낸 신성약품이 유통한 물량을 전량 폐기한다면 이 같은 걱정도 사그라지겠지만 유통 물량이 500만도즈, 500만명이 접종할 수 있는 숫자이다 보니 사실상 전량 폐기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무료 접종 대상자를 지난해 1381만명에서 올해 1900만명까지 늘리면서 백신 공급 물량이 애초 빠듯한데다 코로나19 때문에 예년보다 독감 예방접종에 나서는 사람들도 많아질 전망으로 상온 노출 사고 이전부터 물량 부족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문제 독감 백신 재사용 한다는데믿을 수 있나 [그래픽=이데일리 이동훈 기자]
◇상온 노출 사고 왜 터졌나…하청에 하청, 종이상까지 ‘설상가상’

이번 백신 상온 노출 사고는 백신 조달사업에 처음 참여하는 업체가 여러 하청을 통해 백신을 배송하면서 발생했다. 이 때문에 질병청 등 당국의 책임론도 불거지고 있다.

의약품 도매 기업인 신성약품은 백신 배송을 위탁 업체에 맡겼고, 해당 위탁업체는 또다시 하청을 통해 백신을 지역으로 운반했다.

이 과정에서 위탁업체의 하청을 받은 운송 직원들이 냉장차 문을 열어두고 백신이 담긴 종이박스를 바닥에 내려두거나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2~8도 사이의 온도에서 배송돼야 할 백신이 상온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

백신이 담겼던 종이 상자 역시 문제가 되고 있다. 만약 백신이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용용기에 담겼다면 큰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질병청은 냉장차를 이용한다면 꼭 수용용기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으나 종이 상자이기 때문에 백신이 상온에 그대로 노출되는 결과가 발생했다.

상온 노출 백신 가장 큰 문제점은…‘효능 저하’

백신이 상온에 노출되면 가장 큰 문제는 백신 내 단백질 함량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 경우 백신이 부작용을 일으키기보다는 효능이 없는 ‘물백신’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독감을 예방하기 위한 접종이 무용지물일 수 있다는 얘기다.



독감 백신은 병원균을 죽여 만든 ‘사백신’으로 홍역이나 수두 백신과 같은 살아 있는 ‘생백신’보다는 온도에 덜 민감하다.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23일 국회에서 얘기한 바에 따르면 백신은 지역별로 짧게는 10분, 길게는 1시간가량 상온에 노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박 장관은 WHO의 안전성 시험 자료를 인용해 “백신의 상온 노출 안전 기간보다 짧아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WHO의 관련 자료를 보면 독감 백신은 25도에서 2~4주, 37도에서 24시간까지 안전하다고 돼 있다.

품질검사, 샘플링으로 진행…검사 후에도 국민 불안은 여전할 듯

식약처는 22일부터 상온 노출된 백신에 대한 품질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품질 검사 결과에 따라 500만명분의 백신을 폐기할지, 다시 사용할지 여부가 결정될 전망이다.

질병청의 설명과 WHO 등의 기존 자료로만 보면 이번에 노출된 백신에는 별 이상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신성약품은 상온에 노출된 백신이 17만도즈 정도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식약처의 검사 결과 신성약품이 유통한 물량에 큰 문제가 없다고 해도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식약처가 500만 도즈의 백신을 모두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청이 샘플링해 수거한 제품에 대한 품질 검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사 품목별로 약 110바이알(유리병) 정도만을 검사한다는 것이다.

전수 검사가 아닌 샘플링 검사이다 보니 2주 후 해당 백신 물량이 공급돼 접종이 재개됐을 때 ‘혹시나’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접종 전에 해당 백신이 상온 노출 문제가 발생한 물량에 포함됐다는 사실을 미리 고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이에 대해 질병청은 모든 결정을 식약처의 품질 검사가 끝난 이후에 내리겠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이렇자 무료 접종을 못 믿겠다며 민간 의료기관이 직접 백신을 공급받는 유료 접종을 하겠다며 사람들이 병원에 몰리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최대 2주가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품질 검사 후에도 불안함은 국민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배송 관리 소홀로 독감 백신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 상황에서 품질 검사에 이상이 없다고 해도 이를 쉽게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이에 대해 “조사와 품질검사를 통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먼저 살펴야 한다”며 “폐기나 재공급 등에 대해서는 제품에 어느 정도의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한 후에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