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의 키네토스코프] `곡성`은 `월리를 찾아라`가 아니다

by김병준 기자
2016.06.30 12:00:00

[이데일리 e뉴스 김병준 기자] 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술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영화를 보지 않았거나 스포일러에 민감한 사람은 서둘러 창을 닫길 바란다. 또한 정보 전달이 아닌 주관적 해석에 입각해 작성한 글임을 밝힌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예술을 대하는 상대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넓은 아량을 부탁한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이탈리아의 영화이론가 리치오토 카뉴도는 영화를 ‘제7의 예술’이자 기존 예술을 아우르는 ‘종합 예술’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영상,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예술적 요소들 가운데 내러티브를 이끄는 영화 속 핵심 장치는 무엇일까? 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글에서 나쁜 영화는 나올 수 있지만, 나쁜 글에서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이같은 연유로 나는 감독이 쓴 영화 속 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사’에 집중해 영화를 감상하는 편이다. 앞으로 대사를 통해 영화를 톺아보면서 감독이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함께 이야기해 보자.

(사진=영화 ‘곡성’ 티저 포스터)
오늘은 2016년 상반기를 강타한 문제의 화제작, 나홍진 감독의 ‘곡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추격자’와 ‘황해’ 단 두 편으로 국내 스릴러 영화계의 거장 반열에 합류한 나홍진 감독이 무려 6년 만에 꺼내 든 신작이다. 지난 5월 프랑스에서 열린 제69회 칸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됐던 ‘곡성’은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다.

아직 국내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오컬트(초자연·심령) 장르로 제작됐음에도 ‘곡성’은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29일 기준 집계에 따르면 ‘곡성’은 전국에서 686만524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장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곡성’이 성공한 원인은 무엇일까.

사실 나홍진 감독은 ‘친절함’을 기반으로 하는 사실주의적 연출자였다. 첫 번째 영화 ‘추격자’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범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쭉 범인이었으며, 깜짝 놀랄만한 반전 역시 없었다. 대신 어둡고 무거운 특유의 연출력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두 번째 작품 ‘황해’에서 나홍진 감독은 진화했다. 그는 본인의 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하면서도 열린 결말로 영화를 끝내는 새로운 연출을 시도했다. 그렇게 나홍진 감독은 해석할 여지를 남긴 채 잠시 충무로를 떠났다. 그리고 6년 만에 돌아온 그는 완벽히 새로운 감독이 돼 있었다.

이번 ‘곡성’에서 나홍진 감독은 전작들과는 매우 다른 ‘불친절한’ 연출을 선보였다. 시작과 동시에 계속되는 의문의 죽음, 한 번 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과 복선, 교차 편집으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클라이맥스, 열린 결말을 넘어선 여러 가지 결말 등. 그는 각종 ‘미끼’를 통해 관객을 ‘현혹’했다.

관객들은 아직도 무명(천우희)과 외지인(쿠니무라 준) 중 누가 귀신(악마·악령)인지에 대해 갑론을박 중이다. 현재까지는 무명이 수호령이고 외지인이 귀신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관객은 저마다의 해석과 논리로 다양한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다. 어떤 이는 장모도 외지인·일광(황정민)과 한패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외지인이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을 상징한다는 해석마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귀신은 누구일까? 다소 허무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답은 없다. 나홍진 감독은 애초부터 누가 귀신인지 정의할 수 없는 영화를 제작했다. 개연과 논리를 부여할 수 없는 ‘불친절한’ 편집과 연출로 증명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든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왜 다양한 해석을 강제했을까.

나는 나홍진 감독이 영화 속 반복되는 ‘믿음’과 ‘의심’을 통해 관객이 각자 다른 영화를 보길 바랐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의 바람대로 누구를, 그리고 어디까지를 믿고 의심하는가에 따라 ‘곡성’은 전혀 다른 영화가 된다. 그만큼 대단한 영화임은 분명하다. 나홍진 감독은 “절대 현혹되지 마라”는 경고와 함께,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미끼를 던지며 우리를 현혹하고 있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누가복음 24장 37~39절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성경 구절은 ‘곡성’의 시작과 마지막에 두 차례나 등장한다. 영화에 배치된 모든 것들은 다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이 심오한 구절을 영화의 가장 중요한 처음과 끝에 두 번이나 배치했을 리가 없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을 통해 말하고 싶은 핵심 키워드는 바로 이 ‘믿음’과 ‘의심’이다.

영화에서 일광의 살을 거부한 종구(곽도원)는 효진(김환희)을 병원에 데리고 간 뒤 이삼(김도윤)과 함께 교회를 찾는다. 우리는 스쳐 지나간 이 장면의 대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종구가 그간 겪은 일을 모두 털어놨지만 신부는 이를 하나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신부는 직접 봤느냐고 되물으면서 보지도 않은 채 확신하는 종구를 다그치고 있다.

실제로 종구는 처음부터 외지인을 의심한 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외지인과 관련된 영화 속 이야기는 전부 ‘소문’이나 ‘꿈’으로 묘사돼 있다. 그가 사람을 홀리거나 죽였다는 ‘사실’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심하자.

방송, 광고 등 다방면에서 패러디 되고 있는 효진의 이 대사야말로 나홍진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직설적 메시지다. 그는 효진의 입을 빌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재차 묻고 있다. 감독은 이미 다양한 해석을 강제한 친절하지 않은 연출로 귀신의 존재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대신 성경 구절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극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곡성’은 ‘월리를 찾아라’같은 퀴즈가 아니다. 숨어 있는 월리를 찾듯이 귀신의 존재를 나름대로 규정하는 것은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본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그의 물음처럼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한번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모든 현상을 믿거나 의심하며 살고 있다. 감독은 출처가 불분명한 유언비어에 현혹돼 쓸데없는 의심을 하는, 혹은 주관을 바탕으로 아집을 부리며 불필요한 믿음을 고수하는 우리네 현실을 꼬집고 있다.

영화 속 교회 장면을 다시 곱씹어 보자. 믿음과 의심이라는 실체 없는 추상적인 어휘가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무명이라는 존재를 전적으로 믿은 채 ‘곡성’을 보면 외지인은 영락없는 귀신일 것이고, 절벽에서 떨어져 고통스러워 하는 외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면 무명은 계속 의심스러운 캐릭터일 것이다

지난 5월 제69회 칸국제영화제의 소식을 전했던 매체 스크린 데일리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최근 한국 영화 중 단연 최고다. 나홍진 감독이 한국 영화계를 이끌고 있다”고 영화를 극찬했다. 하지만 동시에 매체는 “강렬하면서도 모호하다. 일반적인 스릴러와는 확실히 다르다”라고 ‘곡성’을 정의했다. 그들이 말한 일반적이지 않은 ‘모호’와 내가 느낀 것이 같은 것이었을지 궁금하다.

예술은 각자가 보고 듣고 해석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정답이 없고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곡성’은 ‘월리를 찾아라’같은 귀신 찾기 영화가 아니다. 영화를 관통하는 ‘믿음’과 ‘의심’에 대한 고찰을 유도하는 심오한 영화다. 단지 오컬트 형식으로 이를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절대 나홍진 감독의 미끼를 물지도, 현혹되지도 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