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아직 멈출 수 없어"…n번방 감시자들의 1년, 그리고 현재

by공지유 기자
2021.01.15 09:22:00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 'eNd' 인터뷰
디지털성착취에 분노한 시민들 '엄벌 촉구' 나서
단체 1년째…"긍정적 변화지만 여전히 제도 부족"
"n번방 잊혀선 안돼…디지털성범죄 완전 근절해야"

[이데일리 공지유 기자] “여성들에게 ‘n번방’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태 해결되지 않고 묻혔을 뿐, 늘 겪어왔던 일들이었죠. 이번에도 그냥 넘어간다면 여성들은 계속 불안과 분노를 반복하다 무기력을 배우게 될 것 같았습니다.”

2019년 말에서 2020년 초, 미성년자를 포함해 여성들을 상대로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박사방’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전 국민이 분노했다. 개인적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건을 공론화하려고 노력한 이들도 있었고, 가해자들의 신상공개를 요구하며 시위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다.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eNd’팀 활동가들도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들의 강력 처벌을 위한 시위를 목적으로 만났다. 이들은 시위활동에서 가해자들의 재판 방청 모니터링 활동까지 영역을 넓혀가며 가해자 한 명 한 명의 재판 과정을 놓치지 않고 쫓았다. 활동가들은 “새로운 해가 시작됐지만 디지털 성착취 범죄는 고사하고 n번방 하나마저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 같다”며 “많이 늦었지만 디지털 성범죄 처벌과 근절을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성년자 등 다수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 착취 영상을 제작·유포한 조주빈이 검찰로 송치되던 지난해 3월 25일 조주빈의 엄벌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n번방 사건 분노로 행동 결심해”…시민들 연대로 단체 결성

‘eNd’는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들의 강력 처벌을 위한 시위를 목적으로 지난해 1월 23일 출범했다. 그러다가 현재는 시위뿐만 아니라 재판 방청 등 여러 형태의 연대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연말 이데일리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한 ‘eNd’팀 활동가들은 각각 다른 시기에 팀에 참여했지만 모두가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활동을 시작했다.

‘우주(활동명)’씨는 “처음 n번방 사건을 접한 뒤 국민청원도 참여하고 개인 sns에서도 사건을 공론화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며 “말이 아닌 행동으로 피해자들의 옆에서 직접 싸울 때라고 느껴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팀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우주씨는 지난해 3월 ‘n번방’ 사건 공론화를 위해 언론팀 팀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뽀또’씨도 지난해 8월 손정우의 미국 송환 불허 결정 이후 사법부 규탄시위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다가 코로나19로 시위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eNd팀에 합류해 디지털성범죄 가해자들의 재판 방청 모니터링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들은 재판 방청 등 단체에서 처음 경험하는 업무들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함께 분노하는 시민들을 보며 활동의 중요성을 느끼게 됐다고 설명했다. 뽀또씨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방청 동행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방청하러 온 분들이 함께 분노해 주셔서 마음이 든든했다”고 회상했다.



우주씨도 “우리가 하는 활동에 계속 관심을 가지며 탄원서 작성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는 분들이 계실 때 많은 힘이 된다”며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연대와 지지의 말을 들을 때 ‘멈추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Nd팀은 ‘리셋’ 등 다른 단체들과 함께 재판이 진행 중인 성착취 가해자들에 대한 ‘엄벌 릴레이 탄원서’ 활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들은 지난해 11월에는 성착취 영상물을 SNS에 재유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잼까츄’의 항소심 엄벌 탄원서 931장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우주씨는 “(탄원서 제출이 재판부에) 영향을 준다. 종종 여러 선고 기일에서 판사가 엄벌 탄원서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었다”며 “탄원서는 국민들이 재판부와 판사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창구”라고 강조했다.

디지털성범죄 ‘eNd’, ‘ReSET’가 조주빈의 선고를 앞둔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법에 조주빈과 공범들의 엄벌 탄원서를 제출했다. (사진=‘eNd’ 인스타그램 캡처)
“소라넷·웹하드 카르텔·n번방…다음은 없어, ‘n번방’에서 끝나야”

활동가들은 ‘n번방’ 공론화가 시작된 후 지난해 한 해 동안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면서도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고 입을 모았다. 활동가 ‘웰빙’씨는 “아직도 성착취물이 인터넷 사이트나 SNS에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걸 볼 때 활동을 멈출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디지털 성착취 범죄는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라고 강조했다.

우주씨는 “(지난해) 디지털 성착취 범죄가 수면 위로 제대로 드러났다는 게 긍정적인 점”이라면서도 “시민들의 사회적 인식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사회 고위직의 인식이나 법적 제도의 변화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우주씨는 이어 “‘n번방 방지법’이 생겼지만 텔레그램같이 외국에 서버를 둔 SNS는 잡을 수 없는 빛 좋은 개살구다. 디지털 성범죄 양형 기준이 강화됐지만 이 역시 기준 적용 여부는 담당 판사의 재량에 달렸을 뿐”이라며 “2021년에는 실속 있고 확실한 법적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n번방’, ‘박사방’에 분노한 시민으로서 이들은 가해자들과 디지털 성착취 범죄에 대한 관심이 끝나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웰빙씨는 “소라넷부터 웹하드 카르텔, n번방 사건은 모두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단기적인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이어져온 것”이라며 “다음 디지털 성착취 사건은 무슨 이름일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단체의 이름(eNd)처럼 ‘n번방에서 끝내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밝혔다.

우주씨도 “찍히거나 유포될까 두려워하고, 찍히지 않아도 누군가가 합성할까봐 걱정하는 삶은 이제 지긋지긋하다”며 “인간답게 살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디지털 성범죄 완전 근절’이라는 국가의 책임이 막중한 임무를 왜 우리가 하고 있어야 하느냐”며 “가만히 지내도 보호받을 수 있고, 안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정부와 국회, 사법부에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