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 증시50년)①미개발의 50년대..채권장사

by김영곤 기자
2004.06.01 12:10:00

[edaily] edaily는 6월1일부터 경제평론가로 활동중인 중견언론인 김영곤씨의 칼럼 `격동 증시 50년`을 연재합니다. 우리나라 증권시장 태동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50여년간 벌어졌던 수많은, 그리고 흥미로운 얘기들을 넉넉히 풀어놓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김영곤 씨는1965년 한국일보 기자로 언론계 생활을 시작해 서울경제신문 증권부 차장, 한국경제신문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중일일보 중앙경제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저서로는 `수표의 애환` `주식 살 때와 팔 때` 등이 있습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註] 증시는 사회의 거울이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를 반영하고 반사한다. 우리 증시도 개설이후 50년의 역사속에서 혼란과 정체, 성장과 발전의 과정과 궤도를 같이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이제 사회전반의 움직임과 그것이 증시에 어떻게 투영됐는가, 그 상관함수를 살펴 과거의 잘잘못을 뒤돌아보며 이를 통해 앞으로 보다 안정되고 발전된 성장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참고자료의 의미로 삼기로했다. ① 미개발의 50년대 ..채권장사 경제경영계 대학생들의 상징적인 차별화는 아무래도 채권장사가 걸맞다. 1950~6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대학축제때 가장행렬 행사라도 있게되면 으레 상경계 대학생들이 채권상인으로 차리고 나오던 것을 기억한다. 왜 하필 그렇게 많고많은 상인중에서 채권수집상으로 나오는가, 왜 또 그렇게 차리고 나오면 가장 근사하게 보였던 것일까. 그것은 채권이 대중적인 자본동원의 원초적 형태였기 때문이다. 해방후 우리는 불모와 혼란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있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모든 것이 불안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이는 근본적 또는 진정한 인플레이션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본동원의 수단이 채권밖에 없다. 국가와 정부가 원리금 지불을 보증 또는 책임을 지는 채권만이 공급될 수 밖에 없고 강제적이든 어떻든 소화시킬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이 되는 것이다. 채권은 이렇게 해서 대량 발행, 공급되고 또 인플레로 인해 시세가 떨어져 수익률이 높게되니 자연 이에 대한 수요가 형성되고 증대하게 된다. 시장이 있으면 기회는 있다. 또 여기에 공급과 수요의 증대가 있고 그래서 시장은 볼륨이 커져간다. 이래서 이때쯤에 채권상인이 등장하게 된다. 6.25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조금씩 자리잡아가던 시절에 전국 방방곡곡 그 어디서나 "채권삽니다"라며 외치고 다니는 수집상을 자주 만나게 된다. 채권이란 것이 하찮은 종이쪽지에 불과한 것같고 그래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다 곧잘 아이들이 딱지로 만들어 놀기도 했던 것이었던 만큼 대부분 사람들이 단돈 몇푼에 마치 횡재했다는 듯이 채권을 팔아버렸다. 이때의 채권장사들은 바로 그런 찬스를 놓치지않은 선견성과 아울러 기민성을 가지고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휴지조각처럼 하찮게, 귀찮게 생각하고있을 때 이것을 사모으면 충분하게, 아니 예상외로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채권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정보를 갖추고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그러니까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한몫 잡기위해 금광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과도 같이 그런 일맥으로 산하를 누비고 다닌 것이다. 이들 채권수집상은 그러나 따져보면 대부분 영세상인에 불과했다. 이들중엔 심지어 엿장수까지 있었으니까 말해 무엇하랴. 채권을 가지고오면 헌 고무신짝, 부러진 숟가락과 같이 얼마간 값을 쳐서 엿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채권은 대수집상으로 넘어가고 그들은 이렇게 해서 엄청난 이득을 봄으로써 거부까지 됐다. 지금도 대기업을 거느린 알부자중엔 할아버지뻘의 선조가 채권으로 떼 돈을 벌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그러니 앞으로 돌아가서 경제계통 학과학생들이 채권장사로 상징적 희화적 특징을 삼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리라 믿는다. 채권에는 다른 상품과 달리 증권으로서의 난해한 점이 있기 때문에 장사이면서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적어도 대학에서 공부한 전문 지식인이 접근할 수 있는 분야라는 거창한(?)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70년대 까지만 해도 도시의 중심가엔 복덕방와 나란히 `채권`이라는 작은 입간판이 서있는 것을 흔히 목격할 수 있었다. 또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암달러상과 함께 번화가 어느 코너에 앉아 채권팔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흔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처럼 채권은 증권매매에서 선도적으로, 또 중심적으로 어려운 때를 대표하고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