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이진우 기자
2007.11.27 09:40:00
[이데일리 이진우기자]
지중해 특유의 뜨거운 뙤악볕이 채 가시지도 않은 어느 여름날 오후. 스페인 제3의 도시 발렌시아 시내의 한 분수대에서는 희귀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서너명의 남자들이 분수대 앞 가게에서 대형 생수통 예닐곱 개를 사오더니 뚜껑을 열고 분수대에 생수를 콸콸 쏟아버리는 중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 그 모습을 쳐다봤지만 그 남자들은 그냥 씩 웃고 말 뿐이었다. 그들은 빈 생수통을 차에 싣고 어디론가 휙 떠나버렸다.
그 생수통들은 보름 뒤 인천공항 세관 사무실 앞에 다시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담아온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서너명의 남자들이 그 생수통들을 둘러싸며 모여들었다. 인천공항 세관으로 다급히 불려들어온 LG전자 직원들이었다.
"이 생수통들이 불량부품입니까? 이런 식으로 세관을 속이면 어떻게 합니까?"
세관직원은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온 LG전자(066570) 직원들을 몰아세웠다. 그 물통들은 방금 전 스페인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물통들이었다. 커다란 박스에 담아 '불량부품'이라고 신고한 후 국내로 들여오다가 세관에서 들킨 것. 이 물통들 안에는 며칠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떠온 수돗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수출용 세탁기를 연구하려면 그 나라 물이 어떤 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유럽의 물은 석회성분이 많아 빨래가 잘 안되기로 유명한데 특히 스페인 물, 그 중에서도 발렌시아 지역의 물이 가장 열악했죠. 그 물로도 빨래가 잘 되는 세탁기여야 유럽에 수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LG전자 직원들은 세관 직원을 붙들고 통사정을 했다. 세탁기 개발을 위해 수십리터 정도의 발렌시아 지역 수도물이 필요했는데 정식 통관절차를 거치려면 엄청나게 복잡한 단계와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직원들이 고민끝에 A/S용 부품으로 위장해 들여온 것이었다.
어렵사리 세관을 설득해 받아온 물통들은 창원의 LG전자 연구소로 옮겨졌다. 얼마후 '발렌시아 수돗물로도 빨래가 잘 되는 걸 확인한' 수출용 '스팀트롬'이 만들어졌다.
LG전자의 트롬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드럼세탁기다. 이제 최근에 드럼세탁기를 산 미국 사람 5명중 1명은 트롬으로 옷을 빤다. 그러나 4년전 미국 시장에 트롬을 들고 처음 나갔을 때는 그야말로 황무지에 가까웠다.
미국인들은 세탁기를 전자제품이라기 보다는 '기계'라로 생각한다. 온갖 가전제품은 모두 거실과 주방으로 들여놓으면서 세탁기는 지하실에 세탁실을 따로 두고 그 곳에 '처박아' 놓는다.
디자인이나 기능보다는 그저 튼튼하고 잘 돌아가면 그만이다. 빨래를 자주 하지도 않는다. 청바지처럼 값싼 옷을 여러벌 사서 갈아입고 다니며 빨래는 '몰아서' 한꺼번에 한다.
LG전자 관계자는 "그런 미국시장에서 한국산 세탁기는 예쁘장해서 귀엽기나 할까 믿고 돌리기는 어려운 제품으로 인식됐다"며 "그런 인식을 깨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미국인에게 세탁기는 뚜껑을 위로 열고 가운데 커다란 봉이 돌아가며 세차게 물살을 돌리는 '탑로드'방식이 대부분이었다. 트롬같은 프론트 로드 방식은 익숙지 않았다.
LG전자 관계자는 "미국에 처음 진출할 때 세탁기 시장이 연간 900만대 가량이었는데 이중 800만대가 탑로드 시장이었다"며 "탑로드는 여섯개의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어서, 좀 비싸더라도 프론트로드로 승부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농구공 하나도 제대로 들어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둥근 창이 달린 세탁기가 제 역할을 할지 계속 의심스러워했다.
LG전자가 이런 미국인들의 콧대를 꺾기 위해 내놓은 제품이 15Kg 용량의 초대형 세탁기였다. 가정용 세탁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용량이었다. 무조건 크고 봐야 하며 동양에서 만든 제품은 사이즈가 작아 맞지 않는다는 미국인들의 선입견을 깨기 위해서는 '큰 놈'으로 맞대응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
하지만 초대형 용량의 세탁기는 만들고 싶다고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LG전자는 15Kg으로 용량을 키우면서 13kg 제품과 사이즈는 같도록 만들었다. 미국 가정의 세탁실에서 세탁기가 차지하는 공간을 LG전자가 맘대로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LG전자 관계자는 "작은 세탁기안에서 큰 용량의 통을 달아 돌리려면 진동을 제어하는 기술과 모터의 성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큰 통이 덜덜거리며 돌면 내부의 부품들이 손상을 입기 쉽고 15Kg짜리 대형 세탁물을 돌리려면 모터의 힘도 만만치 않게 커야 하기 때문이다.
LG전자는 모터와 벨트를 연결하는 간접 구동방식이 아니라 모터의 축에 세탁통을 바로 연결하는 직결방식 모터를 적용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무조건 큰 세탁기를 좋아하던
한국 소비자들을 상대하면서 단련된 실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