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洞)정부, 일상적 민주주의를 만들다

by김기덕 기자
2021.12.29 09:11:40



[서양호 중구청장] “진정한 민주주의는 작은마을에서 시작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마스 제퍼슨의 말이다.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은 모두 마을(동·洞)정부를 강조했다. 주민이 마을 문제에 직접 참여하는 일상적 민주주의가 있어야 큰 국가의 민주주의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상’과 ‘민주주의’는 겉보기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보통 민주주의는 4~5년마다 찾아오는 선거일에나 실감하는 말이다. 하지만 일상적 민주주의는 다르다. ‘저 골목에 담배꽁초 그만 버렸으면’, ‘겨울만 되면 위험한 가파른 오르막길에 엘리베이터 하나 생겼으면’ 등 살면서 누구나 품는 희망사항이다. 이런 일상적 바람을 주민이 직접 실현하는 게 일상적 민주주의, 즉 동네 민주주의다.

지역의 진짜 필요를 아는 사람들, 주민 뜻을 동네 살림에 반영하려면 정부의 규모는 충분히 작아야 한다. 1949년 지방자치법으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나눈 것도 같은 이유다. 60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행정에 대한 생활상의 요구는 다양해졌으며 주민 권리 의식은 더욱 강화됐다. 이제는 지방정부에서 동정부로 나아가야 할 때다.



중구는 전국 유일하게 동정부를 도입했다. 동정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이를 실현할 잠재력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서울 한 복판에 위치한 중구는 도심공동화 현상을 정통으로 맞았다. 높은 땅값, 주거환경 부족 등으로 인구유출이 계속됐다. 이 결과 중구는 서울에서 거주인구가 가장 적은 도시가 됐다. 하지만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이다. 가장 작은 도시이기에 주민과의 직접 소통은 누구보다 유리할 수 있다. 이 강점을 활용해 민선7기 중구는 동정부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첫 단계로 ‘구청은 작게, 동은 크게’라는 원칙을 세웠다. 주민은 동주민센터가 주거지와 가까운 편이다. 그런데도 권한과 인력은 구청에 집중됐다. 공급자는 편해도 수요자 입장에선 속도와 만족감이 떨어졌다. 이런 이유로 공원 관리·무단투기 단속과 같이 동에서 할 때 주민 만족도가 높은 업무를 이관했다. 지금까지 77개 사무를 동으로 옮겼다.

둘째, 주민이 직접 동의해 한 해 살림을 짜게 했다. 주민참여예산제를 대폭 활성화한 것. 기존 참여예산 규모는 한 해 20억~30억원으로 구 전체 예산의 1%도 안됐다. 참여율도 저조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 중구는 한 해 138억원을 주민 제안 사업으로 편성한다. 호응은 뜨겁다. 매년 참여율이 85% 이상 증가한다. 일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불법주정차가 즐비했던 골목에 장미정원이 생기고, 쪽방촌엔 이불 빨래방이 생겼다. 동네 곳곳에 340건이 넘는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올해 동정부는 12곳의 ‘우리동네 관리사무소(이하 우동소)’로 발전했다. 우동소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처럼 노후 주택가를 돌보는 곳이다. 예컨대 △쓰레기 배출 △보행 안전 △택배 보관 △공구대여 등 생활밀착 서비스를 제공한다. 근무자 전원은 주민이다. 20대부터 60대까지 200여명의 주민들이 우동소를 움직인다. 시너지 효과가 나는 지점도 여기다. 우동소는 주민 사랑방 역할을 한다. 근무자 전원이 주민이다 보니 이웃끼리 수다를 떨듯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동네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해법도 찾는다. 이렇게 ‘주민 골목분양제’, ‘집수리 실버특공대’와 같은 새 서비스가 만들어졌다.

지역문제를 주민 스스로 해결하는 힘은 주민에게 가능한 많은 권한을 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주민이 중심이 되는 동정부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