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시 옥색치마 만들던 어머니 혀에는 굳은살이…

by조선일보 기자
2010.05.13 11:51:00

충남 서천 기행 24시

[조선일보 제공] 충남 서천에서도 돈 자랑, 물산(物産) 자랑은 함부로 하지 말 일이다. "타지 출신 남편까지 데려와 우리 세 자매 모두 고향에서 모여산다"는 서천의 문화관광해설사 박미숙(41)씨는 이런 웃지 못할 예화를 들려줬다. "다른 시골에서는 자식들이 늙은 부모를 찾지 않아 문제라는데, 서천에는 2~3달에 한 번씩 제발로 찾아온다"는 것. "한산 모시와 찹쌀로 빚은 소곡주, 농사와 고기잡이로 벌어들인 부모들의 쌈짓돈이 억 단위"라는 게 그의 풍자 섞은 서천 자랑이다. 포구와 해산물시장의 먹거리 그리고 연초록 물버들과 샛노란 유채로 물든 5월 서천에서의 1박2일.

▲ 2층 식당가에서 내려다본 서천특화시장. 서천 앞바다에서 잡아온 생물(生物)들이 펄떡펄떡 뛰는 삶의 현장이다.

 


금강 하구둑 입구에 있는 '벌과떼 해물칼국수'(041-956-2177)의 해물칼국수로 서천 미각 여행을 시작한다. '조개의 왕'으로 불릴 만큼 매끈하고 광택나는 하얀 백합을 듬뿍 집어넣은 칼국수다. 서해안 포구마다 백합 칼국수 자랑에 여념이 없지만 1990년 금강 하구둑 완공 이후 이곳에는 해물칼국수 군락(群落)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비슷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서천 해물칼국수의 차별성은 열무찰보리비빔밥을 함께 준다는 점. 젓가락으로 비벼도 충분할 만큼 탱글탱글한 찰보리에 시원한 열무를 넣어 비빈다. 최근에는 칼국수와 열무비빔밥으로도 모자라 식당마다 서비스 경쟁이 붙었다. '벌과떼'는 아이 주먹만한 왕만두를, 옆집에서는 돼지 수육을 보너스로 내걸었다. 1인 5500원.





봉선저수지의 연초록 물버들과 신성리 초록 갈대<사진>에서 서천의 봄을 만난다. 마산면의 봉선저수지는 충남에서도 두 번째로 큰 저수지. 청송의 주산지만큼은 아니지만, 물 아래 뿌리를 둔 물버들이 곳곳에서 낭창낭창 흔들리는 매혹적인 저수지다. 최근에는 저수지를 에두르는 산책로를 조성했다. 발목이 편안한 푹신푹신한 흙길이다. 예전에는 버스가 다니던 비포장도로였다는데, 마을 사람 숫자가 줄어들며 정규 노선은 폐지됐다. 흙길 산책로 양쪽으로 조성한 화단에는 쑥부쟁이, 바위취, 무늬비비추, 애기우산, 화살나무 등 우리 땅의 풀과 나무가 반긴다. 옆마을 신성리로 옮겨 갈대밭을 찾는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찍은 그 갈대밭이다. 무려 10만평 규모. 드라마 '추노' 영화 '쌍화점'도 이곳에서 찍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해충방지와 인근 농산물의 생육을 위해 모두 잘라낸 상태. 무릎만큼 올라온 어린 초록 갈대가 여름 이후의 장관을 예고한다. 대략 7월이면 농구선수 서장훈만큼 껑충해진 갈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예부터 서천(군)은 몰라도 한산(면)은 안다고 했다. 한산세모시의 유명세 덕이다. 얼마나 가늘게 모시를 째면 가늘 '세'(細)가 붙었겠는가. '세모시 옥색치마'의 그 세모시다. 하지만 화학섬유의 개발로 1차 위기를 겪은 국산 모시는 중국과의 교역 이후에 치명타를 입는다. 한산모시관(041-951-4100)의 서남옥(52) 문화관광해설사는 "전국에 모시 명맥이 다 끊어지고 이제 우리나라에서 남은 곳은 한산뿐"이라며 한숨이다. 기념관 안에서는 한산의 어르신들이 직접 모시를 째고, 삼고, 베틀로 짜는 모습을 매일 시연(試演)한다. 깻잎을 쏙 빼어담은 모시풀의 속껍질을 물에 적신 뒤 꺼내어 이로 쪼갠다. 모시관 어르신들이 치아로 모시를 쪼개는 모습은 거의 믿을 수 없는 기예(技藝)의 경지. 한 줄로 들어갔던 태모시가 나올 때는 두 줄이더니 다시 이 중 한 줄을 입에 넣어 더 얇은 두 줄로 쪼갠다. 이 과정을 반복할수록 가는 모시가 나온다는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시째기의 역사는 여인 잔혹사이기도 하다. 혀와 입술이 갈라지고 심지어 굳은살이 박인다. 혀에 돋아난 굳은살이라니. 그 굳은살을 수십 번 잘라내고 새로 돋아야 모시째기 일꾼 하나가 나온다니 숨이 턱 막힌다. 열여섯에 시작해 53년째 모시를 쪼개고 있다는 모시관 어르신의 이력에 그저 고개 숙일 뿐.



마량리 동백나무숲에서 서해 바다로 지는 해를 본다. 마량의 동백정 일몰은 서해안에서도 으뜸과 버금을 다투는 곳. 구름 한 점 없던 마량의 앞바다가 오렌지색으로 물드는 순간 500년 된 동백나무에서 동백꽃 하나가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시인 마종기는 '봄이 뒤뜰에서 잠자는 동안/붉은 입술만 가지고 와서/처음부터 나를 떨게 하던 꽃'이라고 동백을 노래했지만 천연기념물 169호인 마량의 동백나무 85주(株)는 이곳 고깃배들의 안녕과 풍어(豊漁)를 위해 심었다고 했다. 문화해설사 박미숙씨가 그 황홀한 석양의 순간, 다시 개입하며 반전을 시도한다. 동백정에서 코 앞에 보이는 섬, 오력도에 얽힌 일화다. 육지에서 보이는 풍광보다 섬 뒤편의 경치가 절경이라는 것. 70~80년대에는 당시의 인기잡지 '선데이서울'이 섬 뒤편에서 핀업걸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고기잡이배들은 가끔 오력도에서 곗날잔치를 벌이기도 한다는 것. 다음 서천 방문때는 미리 고기잡이배를 수배할 일이다.
 



홍원항 횟집타운의 마지막에 있는 '너뱅이 등대 횟집'(041-951-7870)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다. 뭍이 끝나는 곳에 식당 건물을 올렸다. 2층과 3층 모두 통유리창으로 바다 전망이 일품이다. 아쉬운 대목은 가격. 자연산 광어와 꽃게 모두 ㎏당 6만원을 받았다. 새로 지은 시설과 풍광 값이 포함된 가격으로 봐야 할 듯. 서천 광어·도미축제 기간 동안에는 ㎏당 4만5000원으로 낮출 계획이란다. 가격이 부담스러운 여행객이라면 인근 마량어촌계 수산물판매장을 추천한다. 1층은 활어수산, 2층은 식당 구조다. 판매장 내의 원양수산(041-952-6669)에서는 7일 자연산 광어 ㎏당 2만8000원, 갑오징어 마리당 2만원, 도미 ㎏당 3만원, 꽃게 ㎏당 3만5000원에 팔고 있었다. 가격은 당연히 수확량에 따라 그날그날 다르다. 이번 주말(15~16일)은 밀물과 썰물 차이가 가장 큰 사리이니만큼 어획량도 많을 것이다. 원양수산 주인 김세옥씨가 "맛있는 건 항상 맛있고, 사리 때 오면 더 싸고~"라며 명쾌하게 정리한다.



서천 앞바다의 해산물은 결국 한자리에 모인다. 130여곳 점포가 제각각 싱싱한 해산물을 경쟁하는 곳. 서천읍 중심가에 자리잡은 서천특화시장(041-951-1445)이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그야말로 장관이다. 마침 어버이날을 맞아 총천연색 카네이션을 꽂은 상인과 손님이 곳곳에서 흥정을 벌이고 있다. 서천 앞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녀석들 중에 '박대'가 있다. 납작한 모양새가 남도에서 잡히는 서대 사촌쯤 된다. 반건조시킨 박대 열마리 남짓을 일흔아홉 이상임 할머니(041-953-0307)가 2만원씩에 팔고 있다. 카네이션 가슴에 꽂은 할머니는 "비싸다고? 박대는 싸구려가 아니여. 구워먹고 튀겨먹고, 그냥 먹어도 맛있제. 이건 고급이여, 아무나 먹겄남?"이라며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