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용익의 록코노믹스]펑크 록의 정신이 된 DIY

by피용익 기자
2019.11.16 09:09:09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두잇유어셀프(Do It Yourself·DIY)는 전문가의 도움 없이 무엇을 스스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서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이 개념은 주로 가구 제작이나 정원 손질 등의 분야에서 쓰이기 시작했지만, 1970년대 이후 록 음악으로도 범위가 확장됐다.

1970년대 중반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 태동한 펑크 문화는 개인의 자유, 권위주의 반대와 함께 DIY 정신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펑크 문화의 영향을 받은 펑크 록 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음악 생산부터 음반 유통까지 스스로 해결하며 DIY 정신을 지켰다. 당시 메인스트림 록 밴드들이 대형 레코드 레이블과 계약하고 세련된 음반을 찍어내는 동안 펑크 록 밴드들은 인디펜던트(인디) 레이블을 설립해 소량 생산한 음반을 공연장 등에서 판매했다.

케빈 던 호바트 앤 윌리엄 스미스 대학 교수가 쓴 책 ‘글로벌 펑크’에 따르면 1977년 1월 발매된 영국 펑크 밴드 더 버즈콕의 미니 앨범 ‘Sprial Scratch’는 밴드 멤버들이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빌린 돈 500파운드를 사용해 집에서 녹음됐다. 이들은 뉴 호르몬스라는 레이블을 만들어 음반 생산과 유통에 나섰다. 인디 레이블의 시초로 꼽히는 더 버즈콕의 뉴 호르몬스는 누구나 음반을 발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음악 산업에서 갖는 의미가 크다.

이후 영국 곳곳에서 인디 레이블이 생겨났다. 같은해 5월 데스퍼릿 바이시클은 리필 레코드를 설립하고 싱글 “Handlebars”를 발매했다. 이들은 싱글 표지에 음반 녹음에 든 비용이 153파운드라고 적어 화제가 됐다. 노래 가사에는 “쉽고 저렴했어요. 가서 해보세요(It was easy, it was cheap, go and do it)”이라며 동료 밴드들의 인디 레이블 설립을 독려하기도 했다.



데스퍼릿 바이시클의 말대로 음반을 녹음하고 발매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판매였다. 대형 레코드사들은 전국은 물론 세계적인 유통망을 갖고 음반을 배급했지만, 인디 레이블은 그럴만한 수준이 못 됐다. 공연장에서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펑크 전문 잡지에 광고를 내고 주문이 들어오면 우편으로 발송하는 식으로 음반을 팔았다. 이후 카르텔이라는 독립 유통업자 조직의 도움을 받아 음반 유통망을 확대해 나갔다. 거대 음반사의 도움 없이도 음악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시스템을 개척한 것이다.

물론 모든 펑크 록 밴드들이 인디 레이블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 펑크 밴드인 섹스 피스톨즈는 처음부터 EMI와 계약했고, 클래쉬 역시 CBS를 통해 음반을 발매했다. 인디 레이블에서 출발한 밴드들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 곧바로 메이저 레이블로 이적하는 일이 잦았다.

다만 영국 펑크 록 밴드들의 초기 DIY 정신은 1980년대 미국 인디 뮤직 씬을 조성하는 바탕이 됐다. 1990년대에는 한국에서도 많은 인디 레이블이 설립돼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요즘은 DIY가 펑크 록을 넘어 음악 산업 전반으로 확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뮤지션들이 직접 음악을 만들어 곧바로 대중에 선보이는 일이 흔해진 것이다. 2000년대 초에는 마이스페이스를 이용해 음악을 홍보하다 메이저 레이블에 픽업되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은 유튜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