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확대경]탄소중립, 목표만 있고 준비는 손놓은 정부

by문승관 기자
2021.02.18 06:00:00

[이데일리 문승관 기자] 소피는 아들과 딸 두 아이와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다. 독일군 장교가 소피에게 두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며. 소피는 “그러지 말아요(Don’t make me choose)”라고 몇 번이나 사정하다 결국 딸을 버린다. 군인은 울부짖는 딸을 안고 가스실로 간다.

설 연휴 때 다시 본 영화 ‘소피의 선택’ 가운데 한 장면이다. 기차역에서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빼앗길 때 배우 메릴 스트립이 지르던 괴성은 20여 년 전 처음 접했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는 퓰리처상 수상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이 원작이다. 반인륜적 선택을 강요하는 극단적 상황에서 의지와 무관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소피는 결국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다.

정부가 지난해 말 원자력·석탄 발전 감축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확대를 핵심 내용을 골자로 한 9차전력수급기본계획안을 확정했다. 국내 발전량 가운데 70%가량을 차지하는 원전과 석탄 발전을 대폭 줄이기로 했다. 현재 발전 비중에 6.5%를 차지하는 재생에너지를 점차 늘려 부족한 전력 수급을 메워나갈 계획이다. 그 사이 재생에너지의 공백을 메울 ‘중간 계투’로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을 투입하기로 했다.

문제는 재생에너지를 보조할 LNG 역시 온실가스 1GW당 254만톤을 배출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7년과 비교해 24.4%를 줄이겠다고 했지만 LNG 확대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 방안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CCUS(탄소 포집·저장 활용 기술), 그린수소터빈 등을 개발해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만 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불안한 전력수급문제와 LNG에서 발생할 온실가스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며 사실상 전력 수급과 탄소중립 정책 모두를 놓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탈원전·탈석탄에만 정부가 목표를 두다 보니 재생에너지로 대체할 수 있는 전력 수급과 온실가스 배출 등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지난 16일 전 세계에 동시 출간한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에서 탄소중립으로 가지 않으면 코로나19가 10년마다 발생하는 것만큼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온실가스 감축을 추진하려면 정부의 노력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고 은행이나 투자자가 원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아이디어는 정부의 정책 지원과 투자가 있어야 온전하게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한 ‘2050 탄소중립’ 목표를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10차 계획에서 검토·제시하겠다고 했다. 10차 계획은 2년 뒤에 수립한다. 또 탄소중립 목표로 나아가기 위한 중장기 전원믹스 역시 차기 계획에서 검토·제시하겠다고 했다.

전 세계가 탄소중립을 위해 촌각을 다투며 달려나가는 상황에서 2년 뒤에나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게 한가하게만 들린다. 자칫 실기했다가는 벼랑끝에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받을 수 있다. 탄소중립으로 가는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이고 하루라도 빨리, 속도를 내서 달려야할 길이다. 느긋할 여유 따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