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의 IT세상읽기]초(超)협력이 절실한 이유

by김현아 기자
2020.01.25 09:32:55

올해 기업들 신년사 화두는 ‘고객’
고객중심만으로는 전부 못담아
기술 성과 공유 '오픈 이노베이션'은 이미 시작
산업간 융합추세 담은 '국내 기업간 초협력' 필요
숨기는 방식 지양해야..한국형 데이터 거래소 관심

[이데일리 김현아 기자]설 연휴는 잘 지내시는지요. 연휴 전날 벌어진 청와대와 검찰 갈등으로 어수선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더 걱정되는 건 경제가 아닌가 합니다. 가족들에게서 “요즘 살기 좋아졌다”는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첨단 업종으로 꼽히는 IT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의 변화가 어떤 식으로 튈지, 속도는 얼마나 빠를지, 현재 사업 모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CEO들은 일단 ‘고객을 만족시키는데 주력하겠다’고 합니다. 기업평가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의 2020년 신년사 키워드 빈도수를 조사한 결과 ‘고객’이 56회로 가장 많이 언급된 것도 같은 이유죠.

하지만 CEO들도 알고 있습니다. 고객 만족, 고객 가치, 고객 중심이라는 키워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요.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이상철 전 LG유플러스 CEO는 “사용자경험(UX)이란 말을 버리고, 현재의 경험을 뛰어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UI)에 집중해야 세계로 갈 수 있다”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사용자경험(UX)에 기반을 둬서 혁신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기업 스스로 좀 더 지능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발명해내야 고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죠.

이데일리가 신년에 국내 매출액 기준 3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 기업의 43.6%는 올해 ‘4차 산업혁명 대비와 신성장 동력 창출’에 주력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인재 육성과 연구개발(R&D) 강화를 통한 미래 경쟁력 확보’도 16.8%나 됐죠. 이대로 주저앉으면 미래가 없다는 위기 의식이 반영된 겁니다.

그런데 개별 기업이 혼자서 지능적인 UI(서비스)를 개발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인공지능(AI)이 산업의 미래를 크게 바꾸는 시대에선 말이죠. 일단 AI를 만들 ‘데이터’라는 재료가 많아야 하고 알고리즘 개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AI 산업의 인프라 격인 AI 반도체도 필요하죠.

기업들은 수년 전부터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외부 연구소·기업과 성과를 공유해 혁신기술을 이끌어내는 거죠. 미국 버클리대학의 헨리 체스브로 교수가 2003년 처음 제시한 개념이라고 합니다.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개방형으로 만들어 안드로이드폰 생태계를 구축한 게 대표적입니다. 삼성 빅스비, 네이버 클로바, SK텔레콤 누구, KT 기가지니 같은 AI 플랫폼들이 외부에서 가져다 쓸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개발키트(SDK)를 공개하고 자사의 AI 플랫폼 생태계를 넓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픈 이노베이션’ 방식만으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할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 이끄는 자와 이끌리는 자가 있고 반대 꼭지에 있는 산업간 융합 추세는 온전히 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새로운 게 없을까 하던 중에 박정호 SK텔레콤 CEO가 ‘초(超)협력’이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얼마 전 끝난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 CES 2020에서였죠. ‘초협력’이라는 말은 평소 쓰는 말이 아니죠. ‘뛰어넘다’, ‘신속하다’라는 의미의 한자가 붙었지만 어색합니다. 처음에는 ‘협력을 더 잘하자는 말인 듯한데 협력의 경계를 뛰어넘는다로 포장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감이 됩니다.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 글로벌 기업의 본원적 경쟁력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박 사장은 AI에서만큼은 국내 기업들끼리 초(超)협력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AI는 국내 사업자들이 능력을 합치지 않으면 글로벌 사업자에 다 내주고 소비자가 될 판”이라며 삼성전자 고동진 사장에게 제안한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자존심을 버리고 우수한 회사 기술(특허 등 IP)을 함께 쓰면서 브랜드나 서비스는 자율적으로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박정호 사장은 “카카오, KT 등 다른 국내 IT기업들과도 초협력을 해서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이루고 싶다”고 했습니다.

초협력이란 말에는 ‘경계의 허뭄’이라는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기술 노출을 이유로 상대방에게 기술 혁신의 단계를 공개하지 않는 스텔스 이노베이션 같은 방식은 안되겠죠.

올해에는 국내 기업간 다양한 초협력의 사례들이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극장은 첨단 실감형 미디어 체험 공간으로 바뀔 것이고. 국내 방송통신기업들은 국내에서의 합병을 넘어 외국 자본까지 끌어들여 세계 시장으로 뻗어 갈 것입니다. 안전하고 쓰임새 높은 한국형 데이터 거래소까지 만들어진다면 AI 분야에서만큼은 국내 기업들의 초협력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