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결정장애]'주체가 없다'..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 한계

by최정희 기자
2016.05.31 07:00:22

연출자 없는 구조조정에 배우들만 난감
조선·해운 이해관계자 해외 등에 뻗어있어..채권단 `주도권` 없어

[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정부가 4월말 차관급 협의체를 통해 조선, 해운에 대한 구조조정 방향을 밝혔지만, 정작 이를 실행해야 할 관련 업체와 채권단의 혼란은 커져가고 있다. 정부가 구조조정의 연출자로 나서는 듯 했으나 지난 한 달간 보여준 모습은 산업 재편에 대한 큰 그림도 없이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만 매달린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이를 실행해야 할 채권단과 업계는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정부는 지난 달 빅3 조선사를 상대로 합병하거나 사업 부문간 통폐합을 하는 등 소위 빅딜(Big Deal)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각각 소유주가 있는 회사라 정부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이유도 있지만, 통창마찰 우려가 커질 수 있단 부분이 더 크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선작업반 회의에서 지난해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유동성 지원이 정부 보조금이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 해명해야 했다. 그 만큼 구조조정에 대한 외부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정부가 어설프게 개입하면서 혼란만 커져가는 양상이다. 예컨대 금융위는 현대상선 구조조정 과정에서 용선료 인하 협상 시한을 20일로 못 박았으나 이 시한을 넘기자 업계에선 금융위의 시그널을 기다려야 했다. 다시 금융위는 “물리적인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은 금융위의 말 한마디에 주채권은행에 자구안을 제출하고 있다. 자구안을 받아야 하는 주채권은행 입장에선 자구안 보완 등을 요구할 명분이 없다. 산은 관계자는 “주채권은행이라고 해도 자체 평가해 회사가 어려울 경우에 자구안을 요구할 수 있는데 이번엔 금융위가 내라고 한 것 아니냐”며 “정상기업에 대해 얼마나 강한 자구안을 요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조선해양플랜트협회를 중심으로 컨설팅을 통해 빅3조선사간의 사업규모 축소 및 통폐합이 필요하다고 결론이 나더라도 이러한 방안이 구속력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정부가 압박해 이뤄진 컨설팅과 이에 따른 결과를 업계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에 정통한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물밑에선 과잉설비 축소 등 여러가지 산업 재편 방안을 놓고 논의하고 있겠지만 정책 실기 논란이 생길 수 있어 함부로 꺼내진 못하는 입장인 것 같다”면서도 “향후엔 정부가 주도해 구조조정을 하든지, 업체 스스로 판단해 빅딜 등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 역시 실효성이 떨어진단 지적이 많다. 해운업 구조조정만 봐도 채권단이 주도권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용선료 협상과 글로벌 해운 동맹 가입 등의 자율협약 필수조건이 모두 채권단이 컨트롤할 수 없는 해외 이해관계자들과 얽혀 있다. 차입금 역시 선박금융이나 회사채 등에 집중돼 있다. 채권단 스스로도 주도권이 없다보니 `조건부 자율협약`이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자율협약(워크아웃)으로 구조조정을 하려면 채권은행이 들고 있는 채권이 압도적으로 다수여야 하는데 조선, 해운은 그렇지 않아 구조조정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우리는 규모가 큰 기업을 모두 채권은행이 떠안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하다보니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