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 캔버스 밖으로 뛰쳐나온 ‘흰 소’를 만나다

by강경록 기자
2021.02.10 06:00:00

부산 동구 범일동의 이중섭거리
자료=한국관광공사

부산 동구 범일동의 이중섭거리에는 이중섭 화가의 흰소를 테마로 만든 조형물이 있다.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2021년은 흰 소의 해다. 소는 예부터 문학과 그림, 노래의 소재로 쓰였고, 이중섭은 ‘소의 화가’라 불릴 만큼 소와 관련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굵은 선과 역동적인 자세가 인상적인 ‘흰 소’는 이중섭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부산 동구 범일동의 이중섭거리에 가면 ‘흰 소’를 입체적으로 만든 동상을 볼 수 있다.

범일동은 불운한 시대에 살다 간 천재 화가 이중섭의 애환과 예술혼이 깃든 동네다. 평안남도가 고향인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했는데,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물감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는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안긴다. 몇 년 전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한 이중섭의 은지화 3점이 국내에 처음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중섭 화가의 그림들로 꾸민 이중섭거리


한적한 주택가에 조성된 이중섭거리는 소박하면서도 여운이 오래 남는 여행지다. 큰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들면 축대에 설치된 이중섭의 부조가 눈에 띈다. 부산에 내려온 그는 1951년 가족과 잠시 제주에 건너갔다가 그해 12월 돌아와 범일동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이중섭은 부산에서 지내는 동안 ‘범일동 풍경’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자꾸 먹먹해진다. 담벼락을 활용한 거리미술관을 지나면 이중섭의 작품과 편지를 모아놓은 희망길100계단에 닿는다. 가파른 계단이 고달픈 그의 삶을 나타내는 듯,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아련함이 밀려든다. 어려운 시절에도 가족과 그림에 대한 희망을 품은 화가의 환한 미소가 애달파 보인다.

이중섭 화가의 초상


희망길100계단은 난간 부분을 작은 갤러리처럼 꾸며 발걸음을 떼기 쉽지 않다. ‘황소’를 비롯해 이중섭의 작품을 하나하나 관람하다 보면 우직하게 선 소 동상과 만난다. ‘흰 소’를 본떠 만든 조형물로, 마치 그림에 있는 소가 캔버스 밖으로 뛰쳐나온 듯 생동감이 넘친다. 흰 소의 해에 찾은 이중섭거리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이곳을 비롯해 계단 중간마다 작은 쉼터가 있어 화가의 작품과 일화를 감상하며 쉬기 좋다.

이중섭은 부산에서 극심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가족을 아내의 고향인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무척 슬퍼했다.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마다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그의 작품을 보면 가족과 함께한 시간에 가장 행복해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와 가족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다 보면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다.

이중섭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계단을 모두 오르면 범일동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중섭전망대에 이른다. 화가가 ‘범일동 풍경’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그가 살던 판자촌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산 아래 옹기종기 모인 집이 힘겨운 시절을 딛고 일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잔히 들려준다. 오른쪽에 우후죽순 솟은 고층 빌딩이 소박한 풍경에 현대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이중섭전망대는 2017년에 방영한 드라마 ‘쌈, 마이웨이’를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버스를 기다리는 곳으로 나왔다. 전망대 아래층에 있는 카페에서 그윽한 커피 향과 함께 여운을 음미하기 좋다(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운영 여부 확인 필요).

만화 속 세상 같은 성북시장 웹툰이바구길


성북시장에 있는 웹툰이바구길은 또 다른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황미나, 유현숙, 정연식 등 유명한 만화가들이 시장 골목을 개성적인 웹툰 거리로 만들었다. 다양한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시장은 마치 만화 속 세상 같다. 골목 따라 만화 간판과 벽화가 늘어서, 상점을 지날 때마다 만화 주인공이 말을 걸기라도 할 듯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된다. 시장 곳곳에서 좋아하는 캐릭터나 낯익은 웹툰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만화체험관에서 그림을 그리고 스토리를 만들어보는 이색 체험도 할 수 있다.

웹툰이바구길 언덕에는 숨은 보석 같은 책마루전망대가 있다. 동구도서관 외벽에 설치된 경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옥상에 조성된 전망대에 닿는다. 산복도로와 부산항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망이 일품이다. 책마루전망대는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동구의 새로운 명소이자 부산 최고 전망 포인트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증산공원에 세워진 증산전망대


동구도서관과 이어진 증산공원은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아담한 게이트볼장과 운동 기구들이 설치됐으며, 중심에 부산항 전망을 품은 증산전망대가 있다. 노을이 질 무렵에 가면 더욱 운치 있다. 증산공원은 동구 주민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곳이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의 아픈 역사와 만나게 된다. 공원 곳곳에 당시 왜군이 쌓은 옛 성곽(증산왜성)의 흔적이 있다.

부산의 대표적인 도심 공원인 부산시민공원에도 우리 민족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자본가들이 점유해 경마장과 일본 군용지로 사용했으며, 한국전쟁 당시부터 2010년 부지가 반환될 때까지 주한 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주둔했다. 2014년에 문을 연 부산시민공원은 푸른 숲길과 연못, 음악분수, 갤러리, 역사관 등을 갖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 좋다.

주한미군 부산기지 터에 조성된 부산시민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