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없는 한국]②"나무품종 다양할수록 숲은 더 울창"…美IT기업 절반은 이민자가 창업

by이준기 기자
2018.06.04 06:00:30

개방적 이민정책으로 인구절벽 넘자 <上>
"다양성 있는 조직이 훨씬 생산적"
뉴요커, 다문화 생활로 창의성 구현
학교선 다른 문화권과 어울리기 교육
도서관도 소수민족 언어 구비 노력
뉴욕선 非합법 입국자에게도 시민증
포용·인내로 이민자 자립 이끌어

뉴욕의 제4보편교회 봉사자가 지난 3월29일 세족 목요일(부활절 전 목요일) 행사로 미등록 이주민의 발을 씻겨주고 있다.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뉴욕=이데일리 이준기 특파원] “다양성이 있는 조직이 훨씬 생산적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 팀 하포트가 자신의 저서 ‘혼돈에서 탄생하는 극적인 결과, 메시’에 적은 글귀다. 인종과 언어·나이·성별·전통·문화 등이 골고루 섞인 조직과 기업, 사회가 혁신의 바탕이 되는 창의성 구현을 높이고, 결국 높은 생산성을 끌어낸다는 의미다. 하포트의 이론이 가장 잘 구현된 도시가 바로 ‘인종의 용광로’로 불리는 미국 뉴욕이다. 뉴요커들 스스로 “뉴욕의 힘은 바로 ‘다양성’에서 나온다”고 공언하는 배경이다.

이민역사 200년을 자랑하는 뉴욕엔 200여개국에서 모인 330여만명의 이민자들로 북적거린다. 그들의 힘은 실로 거대하다. 미국 기업가정신연구소(CAE)가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하는 ‘2017년 미국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미국 주요 기업의 약 43%가 이민자 1세대 또는 2세대에 의해 창업된 것으로 나타났다. 정보기술(IT) 업종에선 46%에 달한다. 조사를 진행한 CAE조차 “놀라운 결과”라며 “정책 입안자들은 ‘드리머(미성년자 때 미국에 불법 입국한 청소년)’ 80만명의 운명에 대해 더 숙고해야 한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페이스북·우버·맥도널드 등 내로라하는 미국 글로벌 기업이 최근 다양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최고다양성책임자(CDO·Chief Diversity Officer)’라는 직책을 둔 것도 이과 무관치 않다. 실제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보고서에서 “이민(어른 기준) 유입이 1% 증가할 경우 해당국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장기적으로 2%가량 높아진다”고 밝혔다. 스콧 E. 페이지 프린스턴대 교수는 20여년간 수많은 사례 연구와 실험을 거쳐 ‘다양성이 능력을 이긴다(Diversity trumps ability)’는 혁신적인 이론을 제시한 바 있다. 덜 똑똑하더라도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이 똑똑한 사람들로 구성된 동질적인 그룹보다 더 높은 성과를 낸다는 뜻이다. 다양성만으로 뉴욕의 힘을 설명하긴 부족하다. ‘교육’이 뒷받침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는 게 뉴요커들의 설명이다. 뉴욕 공립학교들은 같은 나라 출신 학생들을 한 반에 몰아넣지 않는다고 한다. 팀워크를 할 때도 다른 나라, 다른 지역 출신들을 골고루 섞는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New York metropolitan area·뉴욕시 중심 주변 대도시권) 소속의 조지워싱턴스쿨(GWS) 교사인 조나단 베가는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아이들 간 토론에서 더 나은 아이디어가 배출되는 걸 목격했다”며 “어릴 적부터 다양성의 중요성과 가치를 몸소 느끼게 해주겠다는 게 교육당국의 생각”이라고 했다.

지역 공공도서관에 단지 영어책들만 빽빽이 꽂혀 있는 게 아닌, 한국어를 비롯해 스페인어·중국어·일본어·러시아어 등은 물론 벵갈리어·아랍어로 쓰인 책들이 즐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에지워터 공공도서관의 사서 스테파니 클레어는 “10만여권의 책 중 외국어로 쓰인 책의 비중은 약 5% 정도”라며 “현재 외국어 책 구매 비중을 10% 이상으로 늘린 만큼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맨해튼대학의 이준석 교수는 “나무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숲이 더 번창한다는 등의 연구결과를 보면 생태계에서도 다양성이 집단 전체의 활력을 높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며 “이는 뉴욕시 교육정책의 근간”이라고 했다.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뉴요커 특유의 ‘포용성’도 주목해야 한다. 뉴욕은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문화가 형성돼 있다. 뉴욕시를 구성하는 5개 지역(브루클린·퀸스·맨해튼·브롱크스·스탠튼 아일랜드) 중 가장 공격적인 포용정책을 펴는 지역은 ‘퀸즈’다. 뉴욕주 감사원이 지난달 18일 공개한 ‘퀸즈 경제현황’ 보고서를 보면, 퀸즈는 1980년대 이후 이민자에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결과 최근 10년새 5개 지역 중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일궜다. 지난해 퀸즈의 연간 평균소득은 6만2200달러로, 나머지 지역(5만8900달러)을 압도했다. 빈곤율도 13.6%로 가장 낮았다. 보고서는 “이민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형성된 퀸즈는 도약 잠재력도 가장 큰 곳”이라고 했다.

이민자들이 ‘자립’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내심’도 중요하다. 당장은 ‘골칫덩이’로 보일 수 있지만, 세대가 지나면 언젠간 생산적 ‘뉴요커’가 될 수 있다는 기대다. 최근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이 도입한 뉴욕시민증(IDNYC)이 가장 대표적이다. 합법적이든, 비(非)합법적이든 뉴욕에서 거주한다는 것만 입증하고, 간단한 인적사항만 적어내면 뉴욕 시당국이 누구에게나 발급해준다. 시당국 관계자는 “지금은 보잘것없는 이민자들이라도 교육을 받고 일자리를 얻으면 언젠가는 세금을 통해 이민 지원 비용을 단기간에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중장기적으로 가장 좋은 투자”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