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혼인증서는 믿지 않아"…당돌한 춘향이 왔다

by장병호 기자
2020.05.19 05:30:00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 14일 첫 선
포장만 살짝 바꾼 새롭고 익숙한 창극
판소리 대목 살려 소리 매력 담아
코로나19 이후 공연 재개…24일까지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난 이따위 혼인증서 믿지 않아요.”

지난 14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한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의 한 장면. 이몽룡(김준수 분)이 써온 혼인증서를 춘향(이소연 분)이 도도한 표정과 함께 찢어버린다. 당황한 이몽룡이 “진심이다”라며 애원하자 춘향은 당돌하게 말한다. “그럼 천지신명께 맹세하세요.”

국립창극단 ‘춘향’의 한 장면(사진=국립극장).


춘향을 떠나간 임을 한없이 기다리는 지고지순한 캐릭터로만 생각했다면 놀랄 만하다. 국립창극단의 ‘춘향’은 자신의 생각을 똑 부러지게 내세우는 당당한 춘향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몽룡과의 첫 만남도 신선하다. 이몽룡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춘향이 “양반이 부르면 가야 하니? 못 가”라고 딱 잘라 말하자 객석에선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남녀의 사랑을 다룬 ‘춘향가’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다. 그동안 연극·영화·오페라·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변주돼 왔다. 창극도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으로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1962년 국립창극단의 창단 공연,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축하 공연 등 의미 있는 무대에 올라왔다. 2014년에는 국립창극단이 해외 연출가와 협업한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을 선보이기도 했다.



6년 만에 국립창극단이 다시 무대에 올린 ‘춘향’은 판소리가 바탕인 창극의 본질은 지키면서 캐릭터 설정과 극의 전개 등 포장만 살짝 바꿔 새로움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혼인증서를 찢은 춘향이 이몽룡의 진심을 확인하고 함께 부르는 ‘사랑가’가 그렇다. 이몽룡을 쩔쩔매게 하던 춘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표정으로 “어화둥둥 내 사랑이야”라며 노래를 부른다. 어두운 무대 위를 촘촘히 수놓는 작고 하얀 조명이 마치 두 사람의 우주를 보여주는 듯 몽환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국립창극단 ‘춘향’의 한 장면(사진=국립극장).


변학도의 등장과 함께 시작하는 2막은 판소리의 매력이 더욱 빛을 발한다. 감옥에 갇힌 춘향이 노래하는 절절한 ‘옥중가’, 걸인이 돼 돌아온 이몽룡이 장모인 월매와 만나 부르는 ‘어사와 장모’ 등은 판소리 속 대목을 그대로 무대에 올려 소리에 오롯이 집중하게 만든다. 극의 대미를 장식하는 ‘어사출또’ 장면은 강렬한 기타 사운드에 번쩍이는 조명으로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건반과 기타, 드럼 등 서양악기와 국악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음악, 마당놀이를 연상케 하는 전통연희 장면 등 눈과 귀가 즐거운 장면이 곳곳에 배치돼 있어 지루함을 느끼기 힘들다. 그동안 국립창극단이 선보여온 고전의 현대화와는 다소 거리가 먼 작품이지만 오히려 한국적인 친숙함이 잘 녹아 있다.

이번 공연은 국립극장 창설 7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다. 지난 2월 말부터 코로나19 여파로 극장 문을 잠시 닫았던 국립극장은 ‘춘향’을 시작으로 다시 문을 연다. 지난 14일 첫 공연은 그동안 공연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마스크를 쓴 관객들의 추임새와 박수가 공연을 가득 채웠다. 배우 겸 연출가 김명곤이 대본과 연출, 유수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작창을 맡았다. 작곡가 김성국이 음악을 담당했다. 공연은 오는 2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