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K워치]한은까지 법으로 통제하겠다는 국회…이주열의 선택은?

by이윤화 기자
2021.01.27 03:00:00

국회, 적자국채 발행 한은 직매입 법제화 움직임
독립된 중앙은행 통화정책 수단 통제 후진적 발상
빚내서 경기부양하려다 자산시장 버블 키울 수도
한은 시장과 소통방식도 보다 친절하고 상세해져야

한국은행 전경. (사진=이데일리DB)
[이데일리 이윤화 기자] 4차 재난지원금 지급, 자영업 손실 보상법 등 정치권에선 올해 예산이 본격적으로 집행도 되기 전부터 열심히 돈을 쓸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 필요한 재원 규모가 정확히 집계되지는 않았지만, 자영업자 매출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서는 많게는 수백조원이 필요합니다, 올해 국세수입 예상액이 282조8000억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2007년 이후 한국은행의 국고채 매입 규모. (자료=한국은행)
들어올 돈은 한정돼 있는데 지출을 늘리면 결국 빚이 늘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채무는 올해 956조원, 내년에는 1070조3000억원으로 늘어날 전망입니다. 돈을 빌리려면 정부가 국채를 더 찍어야 합니다. 국채 발행이 늘어나면 채권금리는 올라갑니다(채권값 하락). 공급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가격이 떨어지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한 것이죠.

국채발행이 늘어나면 유동성은 떨어지고 시장금리는 상승 압력을 받게 됩니다. 한국은행이 경기부양을 위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치인 연 0.5%, 사실상 제로 금리 수준으로 내리고 열심히 돈을 풀었는데 헛수고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금리가 올라가면 대출 금리도 따라 상승해 부채비율이 높은 가계 살림에 큰 타격이 될 수 있습니다. 한은이 작년에 이례적으로 발권력을 동원해 사상최대인 11조원에 달하는 국채를 시장에서 매입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경기 부양 재원 마련 위해 국회가 한은 발권력 통제 시도

올해도 코로나19가 지속하면서 한은의 고민도 더 깊어졌습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처럼 마구 국채를 사들일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나마 기획재정부가 찍어내는 국채를 매입 해야 할 상황입니다. 올해 기획재정부는 176조4000억원 규모의 국채를 찍을 예정입니다. 한은도 국채 발행이 너무 많아 금리가 올라가는 상황이 오면 국채 매입을 늘리고 필요하면 매입 시기나 규모 등을 사전에 미국처럼 공표한다는 방침입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선제적으로 장기금리를 억눌러야 할 수준은 아니라며 적극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정치권에서 마구 쏟아내는 경기 부양책 탓에 난감한 처지입니다. 한은으로선 금융 시장 안정도 신경 써야 하고, 동시에 국채 매입 정례화까지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영업 손실보상법에 정세균 국무총리까지 말을 보태고 나섰으니 추가경정예산 편성까지 거론될 수 있습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사진=한국은행)
특히 정치권에선 한은이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매입해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을 특별법으로 발의해 법제화하려는 상황입니다. 자영업자를 돕는 일명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손실보상 및 상생에 관한 특별 법안’에 따르면 자영업자에게 손실 입은 매출액의 70%를 최대 보상하되, 재원 마련을 위해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 발행한 한은이 이를 직매입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채 매입은 한은이 통화정책 수단 중 하나로 채권 시장의 상황에 따라 자율적으로 매입 시기와 규모를 정하고 운용해왔던 것인데, 독립된 중앙은행의 수단을 법제화한다는 것이 생소합니다.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94년 딱 한 번 쌀, 보리 수급 조절 위한 양곡증권 매입이 있었을 뿐이었죠. 채권 시장이 발전하지 않았던 21년 전과 아시아에서 채권시장 2위로 성장한 지금과는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 자체가 다릅니다.



한은 관계자는 “개발도상국이나 국채 시장이 없는 나라들은 몰라도 중앙은행의 적자 국채 직접 매입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인도네시아에서 지난해 8월부터 중앙은행이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발행되는 국채를 직매입하고 있지만 경제 상황이나 부채 규모 등이 다르다”면서 “상장지수펀드(ETF)를 사들이는 일본은행도 국채 직접 매입은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전문가들도 한은의 발권력을 국회나 정부가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도 “최근 국고채 금리 상승은 미국의 국채 금리 상승 동조 현상 등 여러 요소가 있을 수 있지만 최근 발의된 특별법 등 국고채 발행 증가 우려에 대한 영향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면서 “남미나 동남아 일부 국가에서 경기 상황이 아주 나쁜 경우 중앙은행이 국채를 직매입 하는 경우는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 상황은 한은의 국고채 매입에 대한 것을 법으로 규정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설명합니다.

빚내서 경기부양하려다 자산시장 버블 키울 수도

한은은 아직까지는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 일단 연기금, 보험사 등 각종 기관투자자들이 우선 매입한 뒤 그래도 물량이 넘쳐 시장금리까지 올라갈 것 같은 상황이라면 그때 국채를 매입하는 것이 맞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손실보상법은 정치인의 ‘표퓰리즘’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사안이 그리 가벼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22일 자영업 손실보상제가 필요하다고 언급하자 국채 금리가 오름세로 전환하면서 곧바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25일 전 거래일보다 0.013%포인트 오른 1.006%으로 장을 마쳤습니다. 이는 지난해 4월 29일 1% 대를 넘긴 이후 최고치입니다. 5년물, 10년물, 20년물 등 장기물 국채 금리 모두 전 거래일보다 0.02%포인트 이상 올랐습니다. 국고채 공급물량이 대폭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채권 금리를 끌어올린 것이죠.

그동안 채권 시장에선 정부의 국채 발행이 증가할 조짐을 보일 때마다 한은에 국채 매입 계획을 묻는 질문에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은은 국채 매입을 정례화하거나 그 계획을 미리 밝힐 만큼 시장 금리가 비정상적인 흐름을 보이진 않는다는 판단입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5일 기자간담회에서 장기 금리 상승에 대한 질문에 “경기 개선 기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답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정치권의 자영업 손실보상법 논의가 무르익고 재원 마련에 대한 고민이 봇물 터지듯 나온다면 한은이 “필요한 때 알아서 하겠다”라고만 일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기준금리를 더 내리긴 어렵고 국채 발행에 따른 시장 금리 상승은 막아야 하고, 결국 한은의 국채 매입 규모, 이에 따른 한은의 의사소통 방식은 앞으로는 더 달라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금융통화위원회 내부에서도 이런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긴 합니다. 한 금통위원은 작년 10월 14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주요 선진국들이 금리 수단이 없어진 후 양적완화를 취하기 전 어떻게 국고채 매입을 해왔는지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은 내부에선 국고채 매입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 등이 혹여나 시장에 유동성을 더 풀겠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이런 유동성이 가뜩이나 고공 행진해 버블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주식시장을 더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정부가 빚을 내고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해 그 빚을 떠안아주는 방식으로 풀려나간 돈이 서민 경제를 살리기보다 주식, 부동산 등 자산시장으로 옮겨가고 버블을 부추기는 악순환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