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엘리엇' 나올까

by박종오 기자
2021.02.26 00:10:00

자본시장법 개정안 국회 정무위 통과
경영참여형 사모펀드 '10% 지분 투자 규제' 폐지
美 엘리엇처럼 삼성·현대 등에 소수 지분 투자 가능
시장 통한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 기대

[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해볼 만합니다.”

국내 대형 경영참여형 사모펀드(PEF) 운용사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PEF의 이른바 ‘10% 룰’이 사라지면 한국에서도 미국의 엘리엇 매지니먼트와 같은 행동주의(activism) 사모펀드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동주의 펀드란 대기업 등의 지분을 사들여 지배구조와 재무구조 개선, 배당 확대 등을 요구하고 주주 가치를 높이는 전략을 펼치는 투자 기구다.

사모펀드 제도 개편…PEF ‘10% 룰’ 사라져

그래픽=문승용 기자
25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정무위원회는 이날 전체회의를 열고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현행 사모펀드 제도를 전면 개편하는 것이 핵심이다. 향후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3월 임시국회 본회의 통과가 유력시된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현재 PEF에 적용 중인 10% 룰이 폐지된다. PEF는 기업 경영에 직접 참여해 가치를 높이고 되팔아 이익을 얻는 사모펀드다. 지금은 경영 참여라는 펀드 설립 취지에 따라 반드시 투자하는 기업의 지분을 10% 이상 취득해 6개월 이상 보유해야 하는 규제를 적용받는다.

그러나 앞으로 10% 룰이 사라지면 PEF의 소수 지분 투자를 가로막던 빗장이 사라진다. 신생 기업에 성장 자금을 공급하거나 대기업의 일부 지분을 매입해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PEF가 시가총액이 50조원이 넘는 현대차(005380)에 투자하려면 10% 룰에 따라 주식을 5조원어치 넘게 사야 한다. 사실상 PEF의 대기업 지분 투자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10% 룰 폐지로 국내 PEF도 미국 사모펀드 엘리엇처럼 삼성이나 현대차그룹 같은 대기업의 지분 1~2%를 취득해 지배구조 개편,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 등 행동주의 전략을 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PEF에 몰린 연기금·공제회 등 기관 투자가의 투자금은 지난해 말 출자 약정액 기준 97조원에 육박한다. 기관의 대체 투자 수요가 확대되며 펀드 하나의 출자액이 조 단위를 넘어서는 공룡 펀드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시가총액 상위 대기업의 소수 지분에 투자할 수 있는 실탄이 충분한 셈이다.

PEF 제도에 정통한 한 자본시장 연구기관 관계자는 “지금도 전문투자형 사모펀드(헤지펀드)는 PEF와 달리 10% 룰을 적용받지 않지만 투자 부담이 크다고 여겨 행동주의 전략을 거의 펼치지 않았다”면서 “PEF에 10% 룰이 사라지면 국내에도 엘리엇 같은 행동주의 펀드 설립이 활성화되는 등 다양한 투자 전략을 구사하는 펀드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헤지펀드는 주식·채권 등에 투자해 단순 수익을 추구하는 사모펀드의 한 종류다. 애초 의결권 행사가 펀드의 설립 목적이 아닌 만큼 투자한 기업의 경영 참여에도 소극적이다.

“행동주의 펀드 활성화 위해 투자자 보호 강화해야”

정부와 정치권이 대주주 견제, 소수 주주 권리 강화 등 제도 개선에 적극적인 것도 행동주의 펀드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작년 말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이 개정안은 상장회사의 감사위원 중 최소 1명 이상을 다른 이사와 분리해 선출하고 이때 최대 주주의 의결권을 특수 관계인 포함 3%로 제한하는 감사위원 분리선임 규정의 개정, 자회사 이사가 회사에 손해를 끼쳤을 때 모회사 주주가 그를 상대로 대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다중 대표 소송 제도 도입 등이 골자다.

이 같은 주주 권리 강화 방안이 PEF의 10% 룰 폐지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국내에서 행동주의 펀드가 활성화되기까진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한진칼(180640) 경영에 참여한 국내 대표 행동주의 펀드 KCGI(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를 이끄는 강성부 대표는 “해외 PEF에는 10% 룰 같은 규제가 없다”며 제도 개선을 반기면서도 “국내에서 행동주의 펀드가 활성화되지 않은 것은 본질적으로 투자자 보호 장치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강 대표는 “(행동주의를 활성화하려면) 이사회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게 최우선”이라며 “외국처럼 이사의 신의 성실 원칙을 회사뿐 아니라 전체 주주에 대한 것으로 확대해 이사회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등 투자자 보호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