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관에서] 노무현 씨앗을 뿌리고 문재인 열매를 거두다

by김성곤 기자
2018.06.22 06:00:00

6.13 지방선거 민주당 압승…이념·지역 기반 정치구조 붕괴
‘일등공신’ 文대통령의 한판승, 3당합당 이전 정치지형 회복
한국당 TK지역정당화…보수 대몰락·향후 재기 전망도 불투명
선거압승에도 ‘배고픈 평화’ 논란…민생경제 성적표가 최대 변수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주민센터를 찾아 6·13 지방선거 사전투표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문재인 대통령의, 문재인 대통령에 의한, 문재인 대통령을 위한 선거였다.”

6.13 지방선거가 막을 내렸습니다. 결과는 민주당의 초대형 압승과 보수의 사망선고입니다. 주인공은 철저히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민주당 승리는 당의 실력이라기보다 대통령 지지율에 기댄 것이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 개인기가 그런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건 정말 온당치 못한 이야기”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이번 선거는 ‘문재인’이라는 키워드를 빼놓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존재 자체가 민주당 대승과 보수참패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울산·경남에서 민주당의 도약은 꽤나 상징적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거 뿌렸던 씨앗을 문재인 대통령이 이제야 열매로 거뒀습니다.

한국 정치의 대전환입니다. 낡은 이념과 지역주의라는 구시대적 정치가 ‘역사 속으로’ 퇴장했습니다. 남북·북미정상회담 성공으로 이제 더 이상 ‘종북 빨갱이’ 타령은 불가능한 정치구조가 됐습니다. 87년 체제 성립 이후 1노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지역분할과 3당 합당으로 고착화된 보수 우위의 지역구도도 막을 내렸습니다. 문 대통령도 지역주의 정치와 색깔론 분열 정치의 종식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현 상황에서는 과연 보수 부활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물론 변수는 있습니다. 바로 ‘경제’입니다. ‘배고픈 평화’의 유효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문 대통령의 최대 숙제는 ‘배부른 평화’입니다.

●광역단체장 선거(17) : 민주당 14 vs 한국당 2 vs 무소속 1

●기초단체장 선거(226) : 민주당 151 vs 한국당 53 vs 평화당 5 vs 무소속 17

●광역의회 선거(737) : 민주당 605 vs 한국당 113 vs 바른미래 1 vs 평화당 1 vs 정의당 1 vs 무소속 16

●기초의회 선거(2541) : 민주당 1400 vs 한국당 876 vs 바른미래 19 vs 평화당 46 vs 정의당 17 vs 민중당 11 vs 무소속 172

●국회의원 재보선(12) : 민주당 11 vs 한국당 1

지방선거 결과를 총선에 그대로 대입하면 민주당은 단독 개헌선인 200석을 훌쩍 넘는 초대형 압승을 거둘 게 분명합니다. 보수로서는 멸망 수준입니다. 사실 보수의 대참패는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탄핵은 촛불민심의 심판’이라는 우리사회의 합의에도 정치보복 프레임을 고집했습니다. 탄핵에 반대했던 김문수·이인제를 각각 서울시장과 충남지사 후보로 내세운 게 대표적입니다. 한국당과 대한애국당의 경계가 불분명해집니다. 국민이 환호했던 남북·북미정상회담에도 ‘위장평화쇼’로 깎아내렸습니다. 바른미래당은 누가 봐도 당선 불가 지역이었던 서울 노원병·송파을 국회의원 재보선 공천갈등에 모든 걸 허비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선거 이후 보수는 답안지를 전혀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져보면 모든 지표는 경고음을 냈습니다. 보수가 배출한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있다는 게 상징적입니다. 보수는 외눈박이 시선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바닥민심은 다르다”며 강변했습니다. “여론조사는 왜곡이다. 대통령 지지자들만 주로 응답한다. 남북 위장평화쇼에 반발하고 경제파탄에 분노하는 샤이보수층이 적지 않다. 안희정 미투, 드루킹 댓글조작, 여배우 스캔들의 역풍을 고려하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모든 건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의 대착각이었습니다. 명분도 시너지도 전혀 없었던 정치공학적 합당의 산물인 바른미래당은 선거 종료와 동시에 당 해체 상황입니다. △재보선 막장 공천 △서울시장 단일화 공방 △안철수의 미국행과 정계은퇴 공방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이번 선거 최대 포인트는 지역주의 정치구도의 붕괴입니다.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정말 꿈꿔왔던 일”이라며 “정치에 참여한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를 이룬 셈”이라고 감격스러워했습니다. 부산·경남·울산, 이른바 PK는 보수에서 진보의 텃밭으로 변했습니다. 90년 기형적인 3당합당 이후 만들어진 영남보수 우위 구조의 해체입니다. 3당합당 이후 보수는 이른바 김대중(호남) 포위구도 속에 돌발악제가 없는 한 각종 선거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뒀습니다. 보수 성향의 영남 유권자 수가 호남보다 두 배 가량 많았기 때문에 영남분열 없이 호남에 기반을 둔 진보진영의 승리는 구조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97년 대선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IMF 사태’의 여파로 정권교체는 당위였지만 결과는 생뚱맞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DJP연합으로 외연을 확대했지만 만일 영남 기반의 신한국당에서 이회창·이인제의 분열이 없었다면 대통령 당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97년 대선 이후 보수·진보는 교훈을 얻습니다. 진보진영은 영남공략에 공을 들였습니다. 김대중·노무현정부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은 영남 패권주의를 깨뜨리지 않고서는 집권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수많은 노력에도 성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상황이 변했습니다. 2010년 경남지사 선거 김두관 당선을 시작으로 20대 총선·5.9 대선을 거쳐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대박을 쳤습니다. 광역단체장이 아닌 부산 구청장 선거를 보면 더 극명합니다. 15개 구청장 중 민주당이 13곳에서 승리했습니다. 97년 대선 이후 보수는 분열을 금기시합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경선 이후 이명박·박근혜가 극심한 경선 후유증에도 한지붕을 유지한 이유입니다. 2007년 정권교체, 2012년 정권재창출에 성공합니다. 심리적 분당 상태에서 치러진 2016년 총선과 실제 보수가 분열했던 5.9 대선에서는 참패했습니다. 보수의 선거승리 방정식은 ‘영남 몰표+수도권 선전’이었습니다. 이제 PK의 정치지형이 뒤집어지면서 불가능한 꿈이 돼버렸습니다.

한국의 정치지형은 영남 민주화세력의 복원으로 역(易) 3당합당 체제가 만들어졌습니다. 과거 호남에 고립됐던 민주당처럼 보수는 TK지역 기반의 지역당이 돼버렸습니다. 대구시장과 경북지사는 승리했지만 세부 지표는 매우 위험합니다. 직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TK지역에 기초단체장 후보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대부분의 지역에 후보를 냈고 득표율도 30∼40% 수준입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에서는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거뒀습니다. 보수는 제로베이스 상태에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특히 40대 이하 연령대에서 이미지는 매우 심각합니다. 그냥 꼰대정당입니다. 이대로 가면 현행 승자독식 구조의 소선거구제 하에서 최대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세대와 지역, 계층으로 외연확장이 쉽지 않기 때문에 향후 선거구제 개편이 없다면 최악의 경우 50석 안팎의 지역정당으로 몰락이 불가피합니다. 역설적인 것은 노무현의 팽생 숙원이었던 ‘선거구제 개편’을 보수가 먼저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당이 과연 응할지 의문이지만 지역주의 붕괴는 한국정치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기폭제가 될 게 분명합니다.

게다가 이념지형도 급변했습니다. 지난 1월초 김정은의 신년사를 시작으로 평창올림픽 전후 남북관계 개선, 1·2차 남북정상회담을 거쳐 6월 중순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진 한반도 정세의 급변은 냉전적 대결구도를 무너졌습니다. 보수 우위의 대전제였던 이념과 지역이 무너지면 남는 건 ‘정책경쟁’입니다. 막대기를 꽂으면 당선이 아닌 낙선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선거 이슈는 우리의 삶과 조금 더 밀접해집니다. 무상급식 찬반이 선거판을 좌우했던 2010년 지방선거와 같은 모범적인 선거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좁은 나라를 동서로 갈라서 영호남 텃밭의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정치는 아웃입니다. 탈(脫)지역주의 정치는 지역이 아니라 세대별, 계층별, 직업별로 유권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무책임한 지역개발보다는 생활밀착형 공약이어야 합니다. 여야가 말로만 외쳤던 △고용 △민생 △세금 △물가 △복지 이슈가 정치와 선거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진보정치의 거목이었던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정치의 본질을 한마디로 압축한 바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바로 민생고 해결입니다. 영화 ‘웰컴투동막골’에서 인민군 장교가 마을촌장에게 위대한 영도력의 비밀을 묻습니다. 동막골 촌장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많이 먹여야지” 실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도자라는 신뢰를 줄 때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2007년 대선 결과가 잘 보여줍니다. 진보의 무능보다는 보수의 부패가 차라리 낫다는 극단적인 인식의 바탕에는 이른바 ‘빵의 문제’가 연결돼 있었습니다. 빵의 문제를 해결하면 선거승리와 재집권,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잘한다 해도 정권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해법을 찾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보수가 어려워진 근본 이유도 ‘경제’입니다. 김대중·노무현정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비판하며 집권했지만 이명박·박근혜정부 때에도 빵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남북관계만 어려워졌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6.13 지방선거 결과를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남북·북미정상회담의 광풍에 문재인정부의 경제실정이 제대로 심판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선거에서는 압승했지만 경제는 사실 문 대통령의 약한 고리입니다. 문 대통령의 국정운영 순항 여부는 빵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경제라는 게 참 어렵습니다. 한국경제는 저출산고령화·저성장양극화라는 구조적 요인은 물론 대외변수에도 취약합니다. 높은 주거비와 사교육비 구조 탓에 가처분소득을 늘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경제분야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면 철옹성 같은 대통령 지지율도 허물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문 대통령은 지방선거 결과에 “우리가 받았던 높은 지지는 굉장히 두려운 일이다. 어깨가 무거워졌다는 게 아니라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정도의 두려움”이라며 ‘유능한 정부’를 유독 강조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과연 ‘배고픈 평화’를 ‘배부른 평화’로 바꾸는 대한민국의 촌장이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