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장벽보다 더 높은 '차별의 장막' 걷어라

by윤종성 기자
2020.04.01 05:03:00

장벽의 시대
팀 마샬|360쪽|바다출판사

[이데일리 윤종성 기자] 냉전 시대 ‘철의 장막’이 걷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만 해도 장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는 냉전 시대보다 훨씬 많은 장벽이 세워졌고, 지금도 담이 쌓이고 있는 중이다. 유럽은 장벽, 담장, 철조망 등으로 이웃 나라에서 넘어오는 난민을 막고 있다. 중동과 아시아도 마찬가지. 이런 장벽은 필요에 의한 실용적 목적보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의심과 거부, 두려움과 기만, 오해와 착각이 숱하게 많은 장벽을 낳고 있다.

언어, 민족, 국가, 소득, 세대 등 다양한 기준에 따른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도 여전히 굳건하다.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시민 사회가 형성되면서 계급은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안의 차별과 혐오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여전히 인도 시민의 가능성을 옥죄고 있고, 중국· 중동· 아프리카에선 여전히 민족이 갈등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선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에 기반한 보수 정치가 부활하고 있다.

한국인 인종차별 의혹을 받은 네덜란드 항공사 KLM 관계자들이 사과를 하고 있다. KLM은 지난 2월 항공기 화장실 문에 ‘승무원 전용 화장실’이라고 한국어 문구를 붙여 인종 차별 논란에 휩싸였다(사진=연합뉴스).




책은 중국의 만리장성부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장벽, 북아일랜드-아일랜드공화국 장벽, 미국-멕시코 장벽 등 물리적 장벽은 물론, 종교, 언어, 민족, 국가, 소득, 세대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장벽에 이르기까지 ‘장벽’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했다. 장벽을 분리와 배제, 고립과 차별의 정치학이 낳은 산물로 규정하고, 인류의 역사 양상과 국제 사회의 역학 관계, 현대인의 사회심리학적 현상을 풀어내고 있다.

전작인 ‘지리의 힘’에서 지정학을 통해 세계사의 숨은 법칙을 풀어냈던 저자가 이번엔 30년 이상 세계의 분쟁지역을 다닌 경험을 토대로 장벽을 키워드로 집필했다. 장벽은 힘있는 국가들에 의해 이동과 통행을, 말과 소리를, 생각과 사상을 나누고 가르고 가두는 도구로 쓰였다. 벽돌과 콘크리트, 철조망으로 이루어진 장벽에는 그 만큼의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거대한 장벽들이 한 순간에 무너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저자는 “세계의 수많은 장벽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장벽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차이와 분리의 문제를 해결할 방책은 언제나 타협”이라고 강조했다. ‘장벽’을 키워드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탐사한 흔치 않은 책이다. 흐릿하지만 갈등과 배척을 넘어 공존의 길을 제시하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