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김용운 기자
2017.11.30 06:00:00
식품업계 '즉석밥' 카테고리 개척한 CJ제일제당 '햇반'
'20년후 가정 간편식 시장 온다' 오너 결단으로 개발
1996년 출시 국내 최초 무균 포장 상온 즉석밥
혼자서 편하게 먹는 밥으로 자리매김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1945년 미국의 군수기업 레이시온에서 일하던 퍼시 스펜서는 새로운 레이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만든 마그네트론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자전관이라고도 불리는 마그네트론은 고출력 2극 진공관으로 강한 극초단파 전자기파를 만들어내는 기기였다. 어느날 마그네트론을 가동하며 휴식을 취하던 중에 주머니 속에 있던 초콜릿 바가 녹아버린 것을 확인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스펜서는 옥수수와 달걀로도 실험을 했다.
마그네트론에서 나오는 극초단파가 물질 내 수분에 닿으면 물질의 온도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극초단파가 수분을 증발시키는 과정에서 열을 내서다. 스펜서는 마그네트론을 통해 음식물을 데우는 기술에 관한 특허를 출원했다. 그리고 레이시온 사는 스펜서의 특허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전제품을 선보인다. 바로 전자레인지였다. 전자레인지의 등장은 식품산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화력을 쓰지 않고 전기로 즉석에서 가열해서 먹을 수 있는 다양한 가공식품의 개발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1978년 삼성전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전자레인지 개발에 성공한다. 전자레인지는 당대 최첨단 가전제품이었다. 가격도 비쌌다. 1979년 삼성전자가 시장에 내놓은 전자레인지 RE-7700의 가격은 39만 4000원이었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이 200~300원 정도였고 도시 근로자 평균 월급이 21만원 내외였던 것과 비교해보면 사치품이라 해도 무방했다.
삼성전자 등 국내 가전회사들은 전자레인지를 수출주력상품으로 선정하고 세계시장에 도전장을 내민다. 1980년대 한국의 명실상부한 간판 가전수출품이 바로 전자레인지였다. 1995년 삼성전자, LG전자, 대우전자(현 동부대우전자) 등 국내 가전기업들의 연간 전자레인지 생산량은 1500만대를 넘어서며 일본 가전기업들의 전자레인지 생산량을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도 전자레인지의 보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9년 출시 초기 전자레인지는 일부 상류층에서만 썼던 값비싼 가전이었지만 1990년대를 기점으로 보급이 본격화하며 대중가전으로 탈바꿈한다. 한국전력거래소의 가전기기 보급률에 따르면 전자레인지의 가구당 보급률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구당 0.2대 정도에 머물렀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전자레인지의 가구당 보급률이 급격히 증가해 1990년대 후반에는 가구당 0.7대까지 치솟는다.
1996년 12월 CJ제일제당에서 출시한 ‘햇반’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가전수출의 간판 제품이었던 전자레인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전자레인지 보급과 맞물려 처음부터 전자레인지로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제품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쌀밥이 주식인 한국인의 식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78년에 설립한 CJ제일제당의 식품연구소는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 인력과 첨단설비를 갖췄다. 다양한 식품분야의 기반기술 연구부터 상품화에 이르기는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식품업계에서 명성이 높았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식품연구소 연구진들은 한국보다 앞서 전자레인지가 일반 가정에 보급된 일본의 가공식품 시장을 면밀하게 살폈다.
일본은 1980년에 이미 레토르트 방식으로 가공밥이 나왔다. 레토르트는 조리한 식품을 특수재질로 만든 봉지에 담아 밀봉한 후 고압가열살균솥(retort)에 넣고 고온에서 가열살균하는 제조방식이다. 이어 1984년에는 냉동밥이 나왔고 1988년에는 무균포장법으로 만든 제품이 나오면서 일본의 즉석밥 시장은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CJ제일제당은 일본시장을 벤치마킹해 즉석밥 연구개발팀을 식품연구소에 꾸린다. 1989년 CJ제일제당은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밥이 되는 알파미로 즉석밥 시장 진출을 타진한다. 알파미는 정백미로 밥을 지은 후 상압 또는 감압 상태에서 급속 탈수시켜 수분율 5% 이하로 건조한 쌀이다. 군용 전투식량 등으로 비상시에 먹을 수 있도록 개발했기에 간단하게 밥을 만들 수 있지만 식감이 좋지 않은 단점이 있다.
CJ제일제당은 동결건조미를 활용해 즉석밥 개발에 다시 도전한다. 동결건조미는 밥을 지은 후 동결한 다음 얼음을 승화시켜 수분을 제거한 쌀이다. 그러나 동결을 거치면서 조직구조가 나빠져 쉽게 부스러지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두 차례 도전 끝에 CJ제일제당은 일본 즉석밥의 무균 포장 방식에 눈을 돌렸다.
무균 포장이란 반도체 공정처럼 미생물과 균이 없는 클린룸에서 살균한 포장재를 이용해 밥을 포장하는 기술이다. 미생물과 균이 전혀 없기 때문에 상온 보관이 가능했고 밥맛이 밥솥에서 한 것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한국도 일본처럼 전자레인지의 보급률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던 상황. 게다가 국내 가전회사들이 반도체 생산에 뛰어들면서 무균 공정에 대한 노하우도 쌓였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1990년대 중반 CJ제일제당은 마침내 무균 포장으로 즉석밥을 만드는 기술을 확보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즉석밥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지도는 낮았다. 쌀로 밥을 지어먹는 것이 아니라 ‘식품회사에서 나온 즉석밥을 사 먹는다’는 인식 자체가 보편적이지 않았다.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밥맛에서 소비자들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전담 연구원들과 생산기술팀원들은 전국의 미곡처리장 1만여 곳을 다녔다. 좋은 쌀을 찾아 하루에 4번 이상 밥을 지으며 최상의 맛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전국의 미곡처리장에서 20~30개의 쌀을 가져와 300여명의 평가단에게 수차례 평가를 받았다. 소비자 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경기도 이천쌀을 즉석밥의 주재료로 선택했다.
당시 CJ제일제당 내 실무진에서는 무균 포장의 즉석밥 보다는 끓는 물에 데워 먹는 레토르트 즉석식품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때 경영진이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다. 초기 설비투자비만 최소 100억원 이상 필요했고 설비를 이용한 제품 확장 가능성이 낮았지만 식생활 변화와 1인가구 등장이라는 거대한 트렌드를 보고 무균 포장 즉석밥 출시를 결단했다. 마침내 1996년 12월 12일 국내 최초의 상온즉석밥을 선뵌다. 제품명은 곡식이나 과일의 일부 명사 앞에 붙어 ‘그해에 새로 난’이란 뜻의 순우리말 ‘햇’과 한자에서 밥을 뜻하는 반(飯)을 붙여 ‘햇반’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햇반은 이후 대한민국의 즉석밥의 대명사로 위상을 굳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