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기신도시 예정지엔 정부·LH 향한 불신 ′폭발직전′

by정재훈 기자
2021.03.16 06:00:00

남양주·고양 3기신도시 예정지역 가보니
왕숙 주민들 LH직원 감시하려 매일 순찰
″3기신도시 사업서 LH 제외해야″ 주장도
창릉에선 신도시 발표전 도면 나돌기까지

[고양·남양주=이데일리 정재훈 기자] 정부가 LH 직원들의 땅투기 의혹에 대한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인 12일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진건읍 일대 왕숙신도시 예정지.

한강 지류인 왕숙천의 동편으로 펼쳐진 나지막한 평야지대를 가르는 곳곳의 도로는 온통 ‘LH 해체하라’, ‘왕숙지구 원주민들의 목을 쳐라’, ‘왕숙에 양아치 LH 직원, 한 발도 들이지 말라’ 등 LH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형형색색 현수막으로 가득하다.

‘LH해체하라’라고 쓴 현수막을 앞에 단 1톤트럭을 탄 왕숙지구 주민들이 지역 순찰활동을 하고 있다.(사진=정재훈기자)
지난 2018년 12월 3기신도시에 포함된 남양주시 왕숙지구는 총 1134㎡ 6만6000호의 주택이 들어서는 매머드급 신도시지만 토지 수용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반발이 꾸준했던 곳이다.

최근 LH 직원들의 땅투기 의혹이 커지면서 이곳 주민들은 LH의 ‘L’자만 보여도 치를 떨 정도다.

실제 기자가 왕숙지구로 지정된 진접읍 내곡리 현장을 취재할 당시 한국토지정보공사 관계자들이 왕숙천 인근 측량을 진행하다 ‘3기신도시 백지화 전국연합회’의 왕숙·진접대책위 임원들이 ‘LH해체하라’라고 쓴 현수막을 화물차에 달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자 “우리 LH에서 나온거 아닙니다”라고 질문도 받기 전, 먼저 나서서 해명하는 상황도 있었다.

왕숙지구 주민들의 LH에 대한 반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차를 몰던 박남길 왕숙·진접대책위 임원은 지난 11일 정부합동조사단이 발표한 국토교통부와 LH 직원에 대한 전수조사 결과 발표를 두고 “어떻게 하면 남에 눈에 잘 띄지 않고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LH 직원들”이라며 “만약 내부 개발정보를 이용해 3기신도시 예정지에 땅을 사들였다면 찾아내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진접읍과 달리 비교적 창고와 공장지대로 이뤄진 진건읍 신월리도 진접읍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는 곳 마다 LH를 ‘땅투기 꾼’으로 규정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가득 차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오랜만에 학교에 등교하던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를 엿들어보니 LH가 뭔지는 몰라도 ‘땅투기꾼=LH’라는 개념은 이해하고 있는듯 했다.



왕숙지구 예정지 일대에 대책위 주민들이 내건 현수막들.(사진=정재훈기자)
왕숙지구 창고주민대책위원회 임원을 맡고 있는 한 주민은 “과거엔 원주민들 땅이었지만 막막한 생계에 하나, 둘 땅을 외지인들에게 처분하고 이제는 그 땅을 다시 빌려 농사나 사업을 하는 씁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 원주민”이라며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직원들의 땅투기를 조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찾아내면 최소한 어제 발표한 내용보다는 더 찾아낼 것”이라고 토로했다.

이런 가운데 남양주 지역 최대 시민단체 중 하나인 다산신도시 총연합회는 최근 LH가 99% 지분을 갖고 진행하는 왕숙지구사업에 경기주택도시공사가 참여해 LH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어 이번 땅투기 논란으로 3기신도시 사업의 LH의 역할이 감소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조사한 결과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고양시의 창릉신도시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부합동조사단의 발표가 끝난 직후인 지난 11일 오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서 만난 이곳 원주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창릉신도시에서도 2명의 직원이 토지를 매입했다는 정황보다 이곳 주민들을 더욱 화나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3기신도시 사업이, 수십년 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정당한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원주민들 보다는 투자 목적으로 땅을 싹쓸이하다 시피 한 외지인들의 돈잔치로 전락했다는 소외감 때문이다.

전성원 고양시 창릉동주민자치회장은 “창릉신도시 조성 계획이 발표되기 약 6개월여 전부터 이 지역 공인중개사사무소에선 알게 모르게 정부의 대규모 택지개발 계획에 창릉동 일대가 포함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구체적인 도면까지 돌았다”며 “그때 도면은 2019년 5월 발표한 창릉신도시 계획과 거의 같았다”고 기억했다.

앞에 보이는 비닐하우스 건너편 부터 멀리 아파트단지까지가 창릉신도시 예정지.(사진=정재훈기자)
이곳에서 수년째 식당을 운영한 최모씨는 기자를 건물 옥상으로 끌고 올라가 손가락으로 구체적인 위치까지 짚어가면서 어떤 땅이 3기신도시 발표 전, 창릉지구에 편입됐다가 빠지고, 빠졌다가 최종에는 편입된 히스토리를 설명하기도 했다.

공대석 ‘3기신도시 백지화 전국연합회’의 왕숙·진접대책위원장은 “‘땅 사뒀다가 개발되면 돈 벌 수 있다’는 분위기가 기정사실화 되면서 이번 LH 사태를 낳은 것 아니겠냐”며 “부동산에 대한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3기신도시 등 8개 지구에서의 국토교통부와 LH 전 직원 토지거래를 조사한 결과 총 20명의 투기 의심 사례를 확인했으며 고양 창릉지구와 남양주 왕숙지구에선 각각 2명과 1명이 포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