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박물관]①'조센징' 욕먹으며 韓 조미시장 광복 이끌어

by김태현 기자
2017.09.01 06:00:00

국산 조미료 시대 연 대상그룹 ''미원''
日 ''아지노모토'' 韓 식탁서 몰아내
창업주 임대홍 회장, 실험실 들어가면 100일 두문불출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아흔 넘어서도 신제품 개발 몰두

[이데일리 김태현 기자] 최초(最初), 최고(最高) 수식어는 아무데나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개척해야 하는 최초는 어떤 일보다 어렵다.

임대홍 미원그룹(현 대상그룹) 회장의 분신 그 자체인 ‘미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조미료’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입맛을 길들인 일본 조미료 ‘아지노모토’의 대항마로 탄생해 올해로 환갑이 됐다. 1956년 6·25 전쟁 후 폐허 속에서 태어나 61년 동안 국민 밥상을 책임졌다.

2016년 4월 임대홍 회장은 향년 96세로 별세했다. 국산 대표 조미료 미원이 탄생한지 딱 60년이 되던 해다. 미원은 최초의 국산 조미료로 연간 3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면서 1997년 미원그룹에서 이름을 바꾼 대상그룹이 3조원대 기업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어머니의 ‘비법 조미료’에서 요리가 서툰 남자와 신혼부부의 필수품이 된 미원. 4분의 1 티스푼으로 ‘어머니의 맛’을 재현하는 미원은 임 회장의 집념 없이는 태어나지 못했다.

1940년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과를 졸업한 임 회장은 스무 살 되던 해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디뎠다. 전북 정읍군청 산업과에서 일했던 임 회장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사표를 내고 부산에서 새롭게 가죽사업과 무역업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물밀듯이 들어오는 수입물을 목격했다. 그중에서도 한국 식탁을 점령한 아지노모토에 주목했다. 밀수로 들여온 아지노모토가 쌀값보다 비싸게 팔리는 현실에서 기회를 엿봤다.

임 회장은 1955년 조미료 제조 기술을 익히기 위해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오사카의 한 조미료 공장에 취업한 그는 어깨 너머로 제조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인에 대한 편견이 짙었던 일본에서 머슴살이를 한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공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열망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고군분투 끝에 그는 조미료 성분으로 아미노산의 일종인 글루타민산 제조기술을 터득했다. 부산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조미료 제조공법 개발에 몰두했다. 제조기술은 알았지만 국내에서 이를 재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기에다 일본 아지노모토사는 거액의 기술 이전 비용을 요구하며 미원 개발을 방해했다. 임 회장은 그러나 한번 실험실에 들어가면 100일 동안 틀어박혀 연구할 정도로 제조공법 개발에 집중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우선 글루타민산을 추출할 때 발생하는 고온과 염산을 견디는 용기를 만드는 게 고난이었다. 염산은 강철도 녹였기 때문에 강철 사용은 엄두도 못냈다. 그때 임 회장이 생각해낸 것이 ‘석부(돌솥)’다. 돌로 만든 용기라면 열과 염산을 견딜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그는 4개월 동안 전국을 누비며 돌을 찾았고 석공과 함께 다듬은 끝에 석부를 완성했다.



석부를 완성한 임 회장은 이듬해인 1956년 부산에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순수 국내 자본과 기술로 만든 최초의 국산 조미료 미원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사진=대상 제공)
동아화성공업은 1962년 사업 확장과 함께 사명까지 미원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영업에 나섰다. 1960년대 미원의 아성을 노리는 △일미 △선미소 △미영 △닭표맛나니 △미풍 등 아류 조미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류 조미료 중에서도 삼성 계열의 제일제당 ‘미풍’의 도전은 거셌다. 제일제당은 1963년 원형산업을 인수하면서 아지노모토와 기술 제휴를 통해 조미료 사업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한 두 조미료 간 전쟁은 198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특히 1977년 시작된 두 회사의 경품 광고 경쟁은 정부가 개입할 정도로 과열양상을 빚었다.
금반지를 경품으로 내놓은 미원 (사진=대상 제공)
당시 제일제당은 미풍 빈 봉지 5장을 보내는 1만명에게 선착순으로 3000원짜리 여성용 캐시미어 스웨터를 경품으로 주는 행사를 하기로 계획했다. 당시 3000원이면 일반 근로자 월급의 10분의 1 정도 되는 큰 돈이다. 제일제당의 계획을 접수한 미원은 더 큰 선물로 맞섰다.

미원은 ‘새 포장 발매기념 사상 최대의 호화판 사은 대잔치’라는 제목으로 15만명에게 선착순으로 순금반지를 주는 내용의 이벤트를 진행했다. 결국 판촉경쟁은 미원의 승리로 돌아갔다.

임 회장의 고집과 결단이 아니었다면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원은 치열해진 조미료 시장 경쟁 속에 다른 업체들이 덤핑행사, 외상판매로 점유율을 이어가는 동안 현금 결제만 받았다.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금 결제를 통해 쌓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순금반지 이벤트를 할 수 있었고 제일제당에 완승을 거뒀다. 임 회장의 뚝심이 미원을 국민 조미료로 만든 것이다.

‘실험광’·‘검소한 생활습관’·‘은둔의 경영자’. 임 회장에게 붙은 별명이다. 임 회장의 얘기가 나오면 실험 얘기가 빠지질 않는다.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만 믿는다는 그의 신념이 반영됐다. 미원부터 청정원까지 임 회장의 손을 거치지 않은 제품이 없다.

30년 넘게 그룹을 이끌어 오면서 회사와 집, 연구소에서 실험에 몰두한 임 회장은 1987년 회장직을 장남인 임창욱 현 대상그룹 회장에게 물려준 뒤에도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그의 검소한 생활습관 역시 유명하다. 평생 동안 양복 세 벌과 구두 두 켤레 넘게 가지고 있었던 적이 없던 임 회장은 ‘분수에 맞지 않는다’며 골프조차 치지 않았다. 출장 때도 숙박료가 비싼 호텔 대신 모텔이나 여관에만 묵고 이동 시에도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했다. 임원들이 고급 벤츠 승용차를 선물했지만 시승도 하지 않고 환불했다는 일화도 있다.

아들인 임창욱 명예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신 이후에도 늘 새로운 제품, 국민 건강을 생각하는 제품개발에 몰두하시는 등 항상 연구하는 학자의 모습으로 사셨다. 아흔이 넘으신 연세에도 대상그룹의 미래를 이어갈 새로운 제품에 대한 생각뿐이셨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