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하고 나타난 곤…"일본에서 죽을까, 탈출할까의 문제였다"

by정다슬 기자
2020.01.09 00:57:22

"어떻게 탈출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일본 사법제도의 부당성 강조…"샤워는 일주일에 2번"
"경찰과 닛산이 결탁"…日정부 관계자 이름은 언급 안해

△카를로스 곤 전 닛산·르노 회장이 8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AFP 제공]
[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격정의 기자회견이었다. 지난달 29일 일본을 탈출한 뒤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연 카를로스 곤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은 2시간 넘게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일본에서 얼마나 부당한 조치를 당했는지, 이대로 일본에 있었다면 반드시 유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에게 씌워진 모든 혐의를 자신을 쫓아내기 위한 닛산과 일본 검찰의 음모라고 주장했지만, 자신을 받아준 레바논 정부에 폐를 끼칠 수 없다며 이날 일본 정부 관계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현지시각 8일 오후 3시께 시작한 일본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새까만 검은색이었던 그의 머리를 회색빛으로 염색한 채 전 세계 60개 언론사 100여명의 기자들이 모인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그의 기자회견은 이날 일본언론은 물론, 월스트리트저널(WSJ)·CNN·로이터 등 서방 주요 언론에서 생중계됐다.

일본에서 보석 상태였던 그가 어떻게 엄중한 감시망을 뚫고 레바논으로 탈출했는가에 대해 곤 전 회장은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신 그는 자신의 탈출에 대해 “일본에서 죽을까, 탈출할까의 문제였다”며 자신이 일본에서 탈출한 것을 “인격 살해”를 피하고 “발언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강조했다.

곤 전 회장은 “자신은 테러리스트처럼 다뤄졌다”며 구금 기간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오랜 시간 할애해 설명했다.

창문이 없는 작은 방에서 하루에 30분만 밖으로 나가는 게 허락됐으며 샤워 역시 일주일에 2번만 허락됐다는 것이다. 새해 연휴 기간에는 6일이나 사람과 만나지 못했으며 처방약을 요구했음에도 거부당했고 통역사를 만나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다는 설명이다. 곤 전 회장은 영어, 아랍어, 포르투칼어, 프랑스어를 말할 수 있지만 일본어는 하지 못한다. 또 변호사가 배석하지 않은 채 8시간이나 심문을 받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의 또 다른 관심사는 일본정부가 곤 전 회장의 혐의나 체포에 불법적으로 관여했는지 여부였다. 앞서 곤 전 회장은 6일 폭스 비즈니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나를 축출하기 위해 닛산이 쿠데타를 벌였다는 실질적인 증거와 서류들이 있다”며“이번 주 기자회견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밝힐 것이며 여기에는 일본정부 관계자들도 포함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곤 전 회장은 시종일관 자신의 체포와 기소는 닛산과 검찰의 음모라고 강조했다. 닛산의 실적이 2017년 이후 하락하는 상황에서 르노·닛산의 합병을 고려되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체포와 기소를 주도한 자로 자신의 후계자였던 사이카와 히로토 닛산 전 사장을 비롯해 도요타 마사카즈 닛산 사외이사, 이마즈 히도토시 전 닛산 감사역, 카와구치 히토시 전 닛산 부사장 등을 들었다. 또 곤 전 회장의 부정을 내부고발한 오누마 토시아키 전 닛산 비서실장과 하리 나다 전무의 이름도 거론했다.

다만 당초 예고했던 일본 정부 관계자에 대해서는 “레바논 정부를 위해서”라며 언급하지 않았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그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음모에 관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일본 정부가 자신의 기소와 체포에 관여했는 지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거부했다.

곤 전 회장은 일본의 유죄판결률이 99.4%이라며 “편견이 없는 정의 앞에서 재판을 받을 준비가 돼있다”고 말했다. 레바논이나 브라질, 프랑스 등 자신의 국가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브라질에서 태어났지만 레바논에서 자랐으며 프랑스와 레바논, 브라질 시민권을 갖고 있다.

다만 그는 프랑스는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레바논에서 당분간 거주할 생각을 나타냈다. 곤 전 회장은 2016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치러진 호화 결혼식 비용으로 회삿돈으로 유용한 혐의 등을 놓고 프랑스에서도 기소된 상태이다.

일본 검찰이 7일(일본시간) 아내 캐럴 나하스에게 위증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에 대해선 “지난해 4월에 내 재판에서 증인으로 위증했다는 혐의로 발부했는데 이제 와 이러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2019년 3월 6일 보석된 이후 일본 도쿄에서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을 떠나는 카를로스 곤 전 회장의 모습. [사진=AFP제공]